[시작] 내가 견뎌야 하는 무게
“안녕하십니까! 김현수 인턴이라고 합니다!”
“네, 씩씩하시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장님! 혹시 인턴들이랑 면담하실 생각 없으세요?”
“그거 좋죠! 우리 인턴분께서 하실 말씀이 있나 봅니다!”
안 그래도 면담 신청자가 없었던 터에 사장님은 기뻤는지, 바로 면담 일정을 잡았다. 나를 비롯한 인턴들과 사장님이 식사를 하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참 식사를 하다가, 사장님이 내게 질문을 시작했다.
“근데, 김현수님은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것 아닌가요?”
이 질문을 듣고 나도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나도 이 당시에 이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몇 개월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인턴들 일부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성희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까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이런 폭언을 들어야 하는 곳이라면 정규직이 되어도 고통스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음...네.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처음 이 기관에서 인턴 시작할 때는 우수 인턴이 된 다음에 여기 정규직도 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많은 문제점이 보여서 계속 일하겠다는 생각은 접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제일 참기 어려웠던 것은, 업무와 상관없는 폭언과 성적 농담입니다.”
사장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성희롱과 관련된 이슈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기관장들은 가능하면 성희롱 이슈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 성희롱 이슈는 걸림돌 같은 것이었다. 사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끌어올리겠다는 그들을 방해하는 걸림돌.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은 그가 받은 충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사장님은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실명까지 거론하며 신고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특정인을 문제 삼기보다는 조직 전체에 성희롱에 대해 안일한 인식이 팽배한 것 같습니다. 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개념 없어 보이겠지만 이런 문제를 밑에서 제기하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뀔 것 같지 않아서 사장님께 이런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자 몇몇은 지금까지 봤던 성희롱 사례에 대해서 같이 얘기해주고 맞장구도 쳐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턴들은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바나나 언니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애써 그녀의 식은땀을 못 본 척하고 대화를 계속했다. 몇 분쯤 성희롱 얘기를 하다가, 다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넘어갔고 얼마 뒤, 그 자리도 마무리되었다.
그다음 날, 나는 팀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다.
“팀장님, 죄송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말을 시작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과 나를 성희롱한 남자 직원의 만행을 털어놓았다.
“팀장님, 근데 사장님께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정말 기관 자체가 아직 성희롱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취지로만 말씀드렸어요.”
“일단 힘들었을 텐데, 미안합니다. 솔직히 이런 문제가 있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외면한 부분이 있어요. 그냥 지금처럼 참아주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사실 이런 얘기를 팀장인 내게 털어놓을까 봐 팀원들이랑 점심 식사도 안 했어요. 미안합니다. 현수씨에게 다시 그러지 못하게 저도 팀장으로서 조치 취하겠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기관 전체의 실장을 소집했고, 그 자리에서 실장들이 엄청 깨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뒤 분노한 실장들은 자리에 돌아와서 팀장들을 소집했다. 우리 팀장도 실장님 방에 들어갔고, 1시간쯤 지나고 방에서 나온 팀장님은 나를 불렀다.
“현수씨, 내가 대략적으로 실장님께 말씀드렸어요. 들어보니까 사장님은 좀 조심하자고 그런 거 같고,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실장님이 현수씨 얘기 듣더니 조금 놀라신 것 같긴 하네요.”
조금 놀랐다는 그 실장님은, 얼마 뒤 방문을 열더니 큰 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남자 직원들 다 내 방으로 들어오세요!"
남자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대해 술렁거렸다. 그들은 모두 그 방에 들어갔고, 30분 이상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끔 웅웅 거리는 고함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방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고 있던 입사 시기가 비슷한 인턴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오빠, 안에서 실장이 뭐라고 했어?’
‘이거, 너랑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아. 이름만 말 안 했지 너 얘기야.’
‘도대체 어땠는데?’
‘실장님이 사람들 다 모이자마자 문 닫고 소리 지르고, 종이 던지고 그랬어. 가만 안 둔다고.’
‘아니, 종이를 던졌다고?’
‘어...그래서 다들 화났어. 지금 다 담배 피우러 나간 거 같음. 사람들이 ‘이거 김현수 때문’이라고 함. 남자들이 거의 너를 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 어떡해?’
설마 그럴까 싶었지만, 정말 그랬다. 그들은 내 자리 뒤까지 와서 나를 노려보았고, (내가 뒤를 염탐하기 위해 세워둔 거울엔 그들의 화난 표정이 보였다.) 내 근처에 앉아있는 여자 직원들에게는 "야, 너는 꼬지를 거면 성희롱 말고 차라리 폭행으로 해. 쪽팔린다. 나는 예쁜 여자만 성희롱하니까." 등의 말을 던지고 갔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분명 이런 식으로 해결되길 원했던 것이 아닌데, 오히려 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게 어지러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뒤숭숭한 와중에, 내 자리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김현수입니다.”
“아 현수씨, 나 실장인데 잠깐 방으로 올 수 있나?”
실장님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나? 근데 하필 이 타이밍에 내가 방에 들어가면 사람들 입방아에 엄청 오르내리게 될 텐데, 하필 왜 지금일까? 근데 상사가 부르는데 어쩔 수 있겠는가, 그 방으로 향했다.
“아, 현수씨, 불어 할 수 있지?”
“네? 불어요? 네. 근데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내가 회사 교육으로 불어 신청했거든. 근데 듣지를 못했어. 오늘까지 인터넷으로 시험 봐서 80점 넘겨야 이수 완료야. 시험 점수 못 넘으면 교육비 뱉어 내야 되는데. 대신 시험 좀 쳐줬으면 해서. 아이디는 적어줄게.”
참 실장, 너도 참 너다. 이 와중에 그는 “100점 받으면 티나. 80점만~”이라는 멘트와 눈웃음을 남기며 내게 아이디를 넘겼다.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굳이 나를 불러서 대리시험 얘기나 했다는 것이 소름이었다. 그 방에서 나오는데 앞에 있던 몇몇의 남자 직원들은 내가 추가적인 고자질이라도 한 것처럼 내 뒤에서 중얼거리며 조소를 날렸다.
젠장! 나는 지금 고자질을 한 게 아니라 불어 대리 시험을 보게 생겼다고!
이 상황에서 나는 나대로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이 기관에서 꼭 정규직이 되고 싶었던 바나나 언니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본인의 동기인 내가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면 본인의 정규직 전환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초조해진 언니는 내게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