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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나나 언니_(3)

[시작] 산전수전은 시작하지 않았다

by 하이히니

영숙 책임의 그날 기억은 이랬다.


“책...책임님..”

“소현씨,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아니, 그...그 간식이요. 저...저희 얼마 전에 샀던 바나나...”

“바나나?”

“그 바나나 어쩔 수 없이 저희 동기들이 너무 먹고 싶어 해서 다...다 줘버렸어요. 현수랑, 다른 동기들...전 안된다고 했는데 너무 먹고 싶다고 해서...”

“그래? 맛있게 먹었어? 잘했네.”

“화나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 잘했어.”

“정말 죄송합니다. 동기들이 어차피 저희 팀분들 나이 많고 이 안 좋아서 얼린 바나나 나중에 못 먹는다고...전 안된다고 계속 그랬는데...”


영숙 책임은 바나나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바나나를 동기들에게 줬다고 얘기하는 것도 의아했지만, 인턴들이 ‘이’, ‘나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에 대해 전달받고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를 포함해서 하루에 5~6명 정도의 인턴들이 책임님을 찾아가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한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나는 배신감이 들었다. 영숙 책임님이 무섭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언니의 표정! 그건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도 거짓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게 거짓이었다니! 언니가 걱정되는 마음에 먹지도 않은 바나나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영숙 책임은 나름대로 서로 털어버리고 싶은 속 이야기를 다 털어버리고 헤어졌다. 나도 나름대로 억울한 것들이 많았지만, 영숙 책임도 여간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참고로, 그 뒤에 영숙 책임은 나를 종종 찾아서 언니 얘기를 하며 화를 내기도 했고, 어쩌다가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영숙 책임의 말을 정리해보면,

- 언니는 자료 작성 업무를 할 때, 적절한 자료를 찾지 못하면 혼날까 봐 그냥 상상으로 자료를 작성한다. 가령, 해외진출 계획이 없는 회사가 북미에 진출한다는 자료를 그냥 상상해서 작성해버린단다.

- 자료에 수치를 적어 넣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수치 자료를 못 찾으면 혼날까 봐 상상의 수치를 적어 넣는다. 대충 이쯤이면 이 정도 실적이겠지? 이런 식으로.

- 그런 일 때문에 영숙 책임에게 혼나면, 그날 밤, 영숙 책임보다 선배인 직원에게 전화해서 몇 시간 동안 본인이 자살해야 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직원도 처음에는 안쓰러운 마음에 위로했지만, 나중에는 그 연락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팀으로 전근 요청을 했다.)


그 외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언니랑 정말 모르는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아무 말도 섞지 않은 채... 하지만 얼마 뒤, 내가 그 언니와 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그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했을 시기였다. 갑분 성희롱이 뜬금없는 전개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건 꼭 해야 하는 얘기다.


우리 팀에서 평소에 나를 굉장히 힘들게 하는 권성배라는 사람이 있었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남자 정규직 사원이었는데, 명문대 지방 분교 학사 졸업-본교 석사 졸업 후, 본교 학사 출신인 척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본교 출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본인 기준에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조롱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가 그가 분교 출신인 것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명문대 본교생임을 의심해온 누군가의 검색 실력과 구글 덕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불만에 차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거의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권성배와 같은 학교 본교 출신이라서 본인도 모르게 나에게 피해의식이 생긴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야, 너 왜 웃냐?”

“네? 저요?”

“어, 너 존나 행복한가 보다? 맨날 웃고 다니네?”

“...”

“나는 너처럼 존나 행복한 것처럼 하고 다니는 애들 보면 짜증 나. 내 앞에선 자제해라.”


글에 비속어를 쓰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는 나에게 ‘존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당시 그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났고,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섭고 위축됐다.


“야, 너 너를 사랑하냐?”

“네?”

“너를 사랑하냐고. 너 스스로 너 사랑하냐고!”

“네...”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내가 너를 보면서 짜증 나는 이유가 있었어.”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냥 존나 짜증 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어서 남도 사랑할 수 없거든!”


그의 대사 하나하나가 왜곡된 사랑을 하는 이상한 중2병 인터넷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대사였다. 처음에는 놀라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선배들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그 인사팀에 예쁜 애 알아? 권성배가 걜 엄청 좋아했어서, 몇 번 고백도 했을걸? 근데 데이트 한 번을 못해보고 차였어. 불쌍한 애야. 여자한테 상처가 많아서 저러는 거니까, 그냥 현수씨가 이해해줘. 별일도 아닌데."


선배들이 말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권성배 주임이 엄청 좋아하던 여직원이 있었는데, 그 여직원이 단 한 번도 권성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에 상처가 있어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거니까, 이해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저 말을 들으면서, 난 그 인사팀에 있다는 직원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것인데, 그것 때문에 권성배가 불쌍하다느니, 여자한테 상처가 많다느니...그럼 그 여자 입장은 얼마나 곤란하겠는가!


권성배의 그릇된 행동을 '상처 받은 남자' 쯤으로 포장하는 저런 분위기상,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문제 삼아도 나만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억울하게 참고 살던 어느 날, 그가 다가오더니 또 내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참고로, 난 그날 조금 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야, 너 임신했었지?”


처음에는 내가 잘못들은 건 줄 알았다. 이 얘기를 꺼내자마자 주변 여자 직원들이 그를 모두 쳐다보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내가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너 어릴 때부터 자주 하고 다녔지? 그러다가 임신했었지? 이렇게 큰 원피스를 왜 입고 다니냐?”


자주 하고 다녔냐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 말을 던지고 그는 큭큭대며 사라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참아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정상적인 루트라면 팀장이나 담당 팀에 가서 이런 사실을 털어놨어야 했지만, 난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회사를 잠깐 다니면서 목격했던 성희롱 사례가 워낙 많았다. 정규직 시켜줄 테니까 춤춰보라는 둥, 자위하기 전엔 자위할 때 상상하고 싶은 여자 앞에서 기타를 쳐준다는 둥(참고로, 내 앞에서도 기타를 친 적 있음...하...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명곡을 내 앞에서 연주해버리는 바람에, 지금도 기타로 연주하는 그 곡을 별로 듣고 싶지가 않다.)


이런 것들을 눈 감고 용인하는 분위기에선 팀장에게 말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내 입장에서 그들은 이미 한패였다.


나는 더 강한 한 방을 위해서, 기관의 사장님에게 면담을 신청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원하면 언제든 면담을 신청하라고 했었다. 면담 하면서 뭐든 얘기해도 좋다고 했다.


물론 신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턴이, 그것도 정규직 전환 심사를 앞두고 있는 인턴이, 진짜 면담을 신청할 용기를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계획만 세우고 면담을 신청할 엄두는 못 내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사장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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