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산전수전은 시작하지 않았다
동기모임 이후, 다들 이전보다 바나나 언니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녀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큰 피해가 없긴 했지만 작고 시시콜콜한 것들이 쌓여 그녀와 점점 멀어졌다.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바나나 언니를 마주쳤는데, 뜬금없이 영어 점수를 묻는 게 아닌가?
"현수야, 너 토익 몇 점이야?"
"저요?"
"응. 900점 넘어? 서영이는 900점 안 된다던데. 나는 딱 900점이거든. 너는?"
"전...그냥..."
"900점 넘어? 이것만 말해줘."
"900점 넘기는 해요."
"그렇구나...900점이라는게 아니라 900점이 넘는다는 거지? 나이도 어린데...너 대단하구나..."
이 대화를 나눈 후, 난 본부 내에서 토익 만점자로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와, 너 대박이더라? 토익 만점이라며? 영어 해봐." 소리를 듣고 살아야 했다. 언니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리만 듣고도 '남자친구를 헌팅포차에서 만났다.'라고 유추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걸 간과했던 내가 멍청했다!
지나가다 언니를 마주칠 때면, 그녀는 거의 언제나 땀을 흘리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 날씨에 그러고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 이상 그녀와 가깝게 지내고 싶진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내가 말한 것들은 곡해되어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숙 책임이 나를 찾아왔다.
“현수씨, 혹시 소현씨한테 전화 좀 해줄 수 있어요? 오늘 휴가도 아닌데 오후가 다 되도록 회사에 나타나지를 않아요. 전화를 아무리 해도 안 받고 부모님이랑도 통화해봤는데 출근은 했다고 하고...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요.”
"근데 제 전화는 받을까요?"
정규직을 꿈꾸는 언니가 무단결근을 할 리가 없는데...이상한 일이었다.
인턴들 중 최종 평가를 통해 일정 비율만 정규직으로 전환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언니는 정말 언제나 간절했는데...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 와중에 내 전화를 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갔고, 예상외로 그녀는 내 전화를 받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수야...”
“어 언니!”
“(소곤) 쉿.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춰. 혼자야? 어디야?”
“저는 회사죠. 언니 어디예요?”
“목소리 낮춰!”
“(소곤) 어디예요? 회사 왜 안 오세요? 다들 걱정해요.”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나 사실 납치 당할 뻔 했어. 다들 평범하게 숨어 있지만 다 알 수 있어.”
“네?”
“조용히 해!”
대관절 무슨 소리지? 작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던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현기증이 났다. 현실 세계가 아닌 느낌이었다. 언니의 말이 사실이어도, 거짓이어도 모두 무서운 상황이었다. 아찔했다.
“현수야, 너만 들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그럴 자신 있지?"
"네..."
"확실히 얘기해줘. 자신 있어?"
"네."
"나 지금 학교에 와있어.”
바나나 언니가 가 있다는 그 학교. 그곳은 언니가 졸업한 대학교로, 기차를 타도 몇 시간이 걸릴 정도로 서울과 굉장히 멀었기 때문에 출근하다 갑자기 갈 만한 그런 곳이 아니었다.
"갑자기 거기까지 간거에요?"
"어. 기차 탔어.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녀의 말에 따르면, 출근 중에 본인을 미행하는 악의 무리를 다수 마주했고, 다행히 그들의 존재를 먼저 알아채 빠르게 기차역으로 이동하여 그들을 따돌렸다고 한다. 그들을 피하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본인의 모교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장 차림으로 있으면 발각될 가능성이 있어서 와이셔츠를 벗고 티셔츠만 입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했는데, 언니가 그 소원을 이뤄주려는지 나를 혼돈의 세상으로 이끌었다. 언니의 긴 설명을 듣고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간혹 이런 일을 겪어서 눈치가 빨라진 자신을 꽤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거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음...아...고생이 많으셨네요. 언니...음...그러면...어쨌든 그럼 오늘 못 오세요?”
“어. 아무래도. 그리고 너 입조심해. 말하지 않는 편이 너에게도 좋을 거야.”
"네?"
"너까지 당할 수 있어. 난 이런 일을 자주 겪어서 바로 알아차렸지만, 너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거야."
“언니, 근데 영숙 책임님한테는 말해도 돼요? 걱정하시는데.”
나는 그 와중에 언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고, 허락을 득한 뒤에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영숙 책임에게 갔다.
사실 나는 바나나 언니의 말에 너무 놀라 계속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영숙 책임은 생각보다 태연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음...그랬구나. 놀랐지? 현수씨, 잠깐 시간 괜찮아?”
“전 괜찮아요. 그리고 시간도...괜찮아요.”
“사실, 소현씨가 팀에 오고 이런 일이...자주 일어나고 있어. 늘 무단결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영숙 책임은 한에 맺힌 듯 지금까지 바나나 언니와 있었던 일들을 내게 말했다. 우리는 거의 처음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는 사이였지만 바나나 언니라는 주제 아래 대동 단결하여 서로에게 공감을 쏟아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바나나 언니에게 갖고 있던 불편감은 같은 팀에서 근무하던 영숙 책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나는 내가 당했던 일들을 토해내고 싶었다.
“책임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저 봉사 활동하다가 남자친구 만났어요.”
“뭐? 분명 나한테 현수랑 그 인턴 둘 다 헌팅포차에서 남자친구 만났다던데?”
“저희 둘 다 거기 간 적도 없어요. 그런 얘기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억울했겠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봉사활동이랑 포차는 너무 다른데, 어쩜 그래?"
“책임님, 그리고 그 바나나, 제가 먹은 거 아니에요. 제가 가서 잘 먹었다고 인사드리긴 했지만, 안 먹었어요. 제 동기들 중에서도 먹은 사람 없어요. 책임님이 바나나 찾으시는데 언니가 무섭다면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랬어요.”
“바나나?”
“네. 기회가 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알아? 나 바나나 찾은 적 없어. 나 바나나 잘 안 먹거든.”
“네...?”
바나나를 찾은 적이 없다고? 영숙 책임의 말을 듣자마자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영숙 책임에게 혼나고 있다고 간절하게 부탁하던 바나나 언니의 얼굴과 영숙 책임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간절한 얼굴이 모두 거짓이었다니...그 얼굴이 거짓일 수가 없는데...바나나를 찾은 사람이 없다니...
“나 바나나 찾은 적 없어...애초에 난 바나나를 잘 먹지도 않고... 그리고 우리팀 그 누구도 바나나 얘기한 적이 없어. 이렇게 또 현수씨 얘기 들으니까 웃기네.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고 말이야. 그래. 간식으로 바나나 샀었지. 근데 그 이후에 딱히 바나나가 떠오른 적이 없었어.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소현씨가 식은땀 흘리면서 나한테 오더니 이러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