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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나나 언니_(5)

[시작] 그녀의 마지막

by 하이히니

‘현수야, 실장님이 성희롱 때문에 부른 거니?’

‘아니요, 전혀 관련 없는 일이에요.’

‘근데 내가 너랑 작당 모의하고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 때문에 정규직이 안되면 어쩌지?’

‘작당모의라뇨.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어요. 이거 때문에 언니가 정규직이 안 되진 않을 거예요.(그냥 이상해서 안 될 거예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너랑 내가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아.’

‘해결이요? 언니, 그러지 마세요...’

‘우리 실 밖에서는 이 소문의 중심이 너라는 걸 몰라. 나만 믿어. 내가 해결할게.’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좀 알게 되었던 나는 언니가 뭘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언니 자리까지 찾아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언니는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닌 듯했다. 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신당부를 한 이후 자리로 돌아왔다.


근데 한 몇십 분 지났을까? 동기 중 누군가가 내게 급히 전화했다.

“현수야, 지금 우리 층으로 빨리 와. 소현이 언니가 좀 이상해”

“네? 왜요?”

동기는 내게 뭔가를 설명하려다가, 그럴 시간이 없다며 빨리 오라고 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그 층으로 뛰어갔다. 나를 본 그 층 동기는 내게 뛰어왔다.

“현수야, 내가 저 언니한테 하지 말라고도 했거든? 근데 너무 무서워.”


바나나 언니는 그 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성희롱당해서 신고한 거 김현수 아닙니다. 실장님이 부른 것도 성희롱 때문에 부른 거 아니래요. 믿어주세요.”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 실의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근데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도대체 ‘김현수’가 누구냐며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을 떠올리니 아무 말도 안 나온다. 그 조용한 사무실에서, 파티션에서 파티션으로 이동하며 나를 (거의) 홍보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


바나나 언니는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자기가 할 말을 계속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광경 앞에서 몸이 굳고 소름이 돋았다.


제발 날 내버려 둬... LEAVE ME ALONE!!


저 광경에 가까이 가는 것이 괴로워도, 언니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언니...”

“현수야, 지금 다 해결되고 있어.”

“언니, 그만하고 저 좀 봐요.”

“지금은 바빠.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해.”

“언니 제발요.”


언니는 나름대로 본인이 목표한 사람들까지 ‘내가 성희롱 사건의 주인공이 아님’을 전파하고 나서 내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우리가 근무하는 층의 회의실로 이동했다.

“언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 그러세요? 도대체...”

“잠깐.”

“네?”

“잠깐.”


언니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언니...?”

“조용히 해.”


솔직히 언니랑 회의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언니한테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명확하게 내 뜻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언니의 말투와 반응, 눈빛을 보니 단 둘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온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언니가 무섭게 느껴졌다.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언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니 얼굴에는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현수야, 너 지금 모르겠어?”

“어떤 걸요?”

“조용히 해!”


그러더니 언니는 회의실에 있던 보드마카로 칠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지금 우리를 엿듣고 있어.’

언니는 글씨를 계속 써나갔다.

‘여기 프로젝터가 우리를 엿듣고 있어. 도청장치야. 제발 여기서 나가자.’라고...


언니 눈에는 눈물이 약간 글썽하게 맺혀있었다. 나도 이쯤 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회의실을 나왔고, 언니는 내게 연신 고마워했다. 그녀는 은혜를 갚겠다며,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다른 층으로 뛰어갔다.


언니가 회사 층층을 돌아다니며 “지금 성희롱당해서 신고한 거 김현수 아닙니다. 실장님이 부른 것도 성희롱 때문에 부른 거 아니래요. 믿어주세요.”라고 말하고 다닌 덕분에, 난 회사 전체에 성희롱 피해자이자 신고자로 소문이 났고, 종종 내 얼굴을 구경하러 온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사에는 피해자인 여자 인턴보다 가해자인 남자 정규직 직원의 편이 훨씬 많았고, 그 뒤로 예전보다 훨씬 더 부대끼는 회사 생활을 해야 했다.


그 이후, 난 바나나 언니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녀와 최대한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같은 팀에 있는 영숙 책임은 언니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언니는 무단결근을 했다. 영숙 책임은 이 모든 것에 지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언니의 부모님에게 전화하여 이런 고충을 털어놓았다.


영숙 책임에 따르면, 언니 부모님의 반응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단다.

“소현이가 회사에 피해를 주고 있나 보네요. 잘 타일러서 그만두게 하겠습니다.”


언니의 부모님이 저렇게 말하고 얼마 뒤, 그녀는 정말 영숙 책임에게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했다. 언니가 사직 의사를 밝힌 그날, 영숙 책임이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현수씨, 잠깐 시간 괜찮아?"

"네. 언니 그만둔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

"네. 회사가 뭐 그렇죠..."

"그만둔다고 하긴 하는데...정작 이렇게 되니까 내가 너무 했나 싶기도 하고 미안하네."


마냥 좋아할 줄 알았던 영숙 책임은, 오히려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며, 이런 얘기를 해줬다.


"소현씨네 부모님이랑 통화하는데...소현씨가 나이가 좀 있잖아. 이력서에는 아무것도 안 쓰여 있길래 아무 일도 안 해본 줄 알았는데, 사실 그동안 5군데도 넘는 회사에서 인턴을 했었다네. 그리고 늘 이런 식으로 회사를 그만뒀었대. 좀... 에휴..."


영숙 책임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본인이 조금 힘들더라도 소현이 언니 계약 만료까지만이라도 함께 일을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렇게 소현이 언니는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떠나면서 본인이 사용한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갔는데, 영숙 책임이 그 비밀번호를 아무리 눌러도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언니가 CMOS에 비밀번호를 걸어두고 가서 회사 개발팀에서도 컴퓨터 포맷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바나나 언니의 컴퓨터에 중요한 내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숙 책임은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든 CMOS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결국 포맷을 위해 컴퓨터를 옮기려는데, 컴퓨터 밑에 작은 수첩이 있었고...그 수첩에는...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행복이 다가간다.


이런 문구들이 자필로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져 영숙 책임은 수첩을 떨어트렸다. 떨어트리면서 펼쳐진 수첩의 다른 페이지에는 역시 빨간 글씨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dsdf@2346


저 문자는 몇 장에 걸쳐서 한 가득 쓰여 있었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밀번호로 'dsdf@2346'을 입력했고, 마술처럼 비밀번호가 풀렸다. 그렇게 비밀번호가 풀리면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많은 일들을 잊게 되었고,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첫 번째, 화가 나는 일을 당해서, 그 일에 대해 신고를 한다거나, 맞서 싸운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앞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날 보호하면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보다 회사의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체계 속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현수가 했던 것보다 더 현명한 해결책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저 신고를 통해, 가해자도 분명 잃은 것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가해자보다 더 힘들어졌던 것은 피해자인 현수였다. 좀 더 좋은 해결책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비정상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필요 이상의 노력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현수는 권주임에게 지속적으로 폭언과 모욕을 당해왔지만, 왜인지 그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하는 말을 참아 보려고 하고, 그가 어떤 상처 때문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까지 했다.

바나나 언니가, 처음 현수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 때도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그 부탁을 들어줬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필요 이상의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다. 그걸 견디다 보면 더 큰 일을 견뎌야 하는 때가 생기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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