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산전수전은 시작하지 않았다
50개월 회사일기
- 내용: 공공기관에서 50개월 일하며 있었던 일들
- 주인공: 김현수(여, 24세)
- 감상 포인트
1) 언제 고구마가 아닌 사이다를 마실 수 있을까?
2) 시간이 지나면서 김현수는 점점 어떻게 바뀌게 될까?
(해당 브런치북은, 여러 개인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각색한 1인칭 시점 기반 소설로, 실제 특정 기관 및 단체, 개인과 전혀 무관합니다.)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어느 날. 그날, 나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최종 합격자 대상 안내] 해당 문자는 금번 B기관 채용 합격자를 대상으로 발송된 문자...(생략)...자세한 내용은 입사 지원서에 기재한 메일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합격이라니...진짜 합격이라니...드디어, 나도 직장인이 된다! 공공기관 정규직이 된 것이다! 난 이제 직장인이다!
"엄마, 나 취업했어."
엄마한테 최종 합격 소식을 알리면서 눈물이 날 뻔도 했다.
"현수야. 진짜 고생 많았어. 정말 축하해!"
"엄마, 나 오늘 일찍 들어갈게!"
최종 합격이라니! 기분 좋고, 안심되었다. 진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 같았다. 가끔 회사가 많은 동네들을 걸으면서 '이렇게 많은 회사 중에 왜 나를 받아줄 곳은 없을까.' 생각했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지나온 수많은 과정들도 머리를 스쳤다.
빡빡하게 써서 제출한 자소서... 소금물의 농도… 수 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던 면접들...
앞으로의 회사생활을 잘 해낼 자신도 있었다. 취업 준비하면서 잠시 공공기관에서 인턴을 해봤던 경험을 토대로, 나 스스로 나름 산전수전을 겪으며 사회의 쓴맛을 봤다고 생각했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냐? 내 인턴 생활은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혹독했다. 그 시절을 회상해보자면, 내가 처음 인턴을 했던 “A” 에서의 두 달은 공포와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그 이유 중 6할 정도는 소현이 언니, 아니 바나나 언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23살이었고, 언니는 30대 초반 정도였다.
그녀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특별한 사회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했고, 지방의 한 사립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졸업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어딘가 늘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역삼각형의 구조였고, 얼굴도 매우 작았지만 그 와중에 얼굴에 비해 입이 매우 작았다. 말을 하고 있을 때도 입을 크게 움직이지 않는 편이어서, 멀리서 보면 누가 말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 여드름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은 늘 붉은 기가 돌았고, 앞머리가 굵은 뿔테 안경의 일부를 가릴락 말락 했다.
바나나 언니는 나와 같은 본부에 있는 다른 팀에 배정받았고, "A" 기관에서 꼭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열정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안에 뭔지 모를 불안함, 불편감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늘 긴장된 상태였고 함께 얘기할 때도 얼이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내 눈에는 언니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그 언니와 잘 맞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교류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당시 13층에서 근무했던 언니와 친했다. 회사에서 13층 언니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바나나 언니까지 그 대화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바나나 언니가 갑자기,
바나나: "너희들 다 남자친구 있어?"
13층: "저랑 현수는 있어요. 언니는요?"
바나나: "없어. 나는 헌팅포차를 안 다니거든."
13층: "네? 저도 헌팅포차 안 다니는데..."
나: "저도 헌팅포차 가본 적 없어요. 근데 갑자기 포차 얘기가 왜 나온 거예요? 여기서?"
바나나: "아무튼 그런 곳 다니면 남자친구가 생기는 거지."
띠용? 갑자기 헌팅포차라니? 이 단어가 어디서 튀어나왔지? 약간 찝찝하긴 했지만, 바나나 언니를 붙잡고 끝까지 해명할 필요를 느끼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화는 어물쩡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난 갑자기 화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현수씨 헌텅포차에서 남친 만났다며?”, “요즘 친구들은 대단하네. 그렇게 애인도 만들고? 화끈하네.”, “언제 나도 좀 데려가라.” 등등…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바나나 언니라는 확신을 했지만, 10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언니에게 따질 용기가 없었기에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 때 이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지 모르겠다. 이때 따지지 않은 것이 앞으로의 일의 화근인 것 같기도...)
시간은 흘렀고 어느 날, 바나나 언니가 급하게 사내 메신저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현수야, 현수야, 지금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무슨 일이세요?'
'큰일이야.'
'네? 무슨 일이세요?'
'우리팀에서 행사 때문에 간식을 샀는데. 간식 중에 바나나가 있었어. 바나나를 몇 송이 샀는데.'
'(띠용? 바나나? 갑자기? 뭔가 이상한데...?) 바나나요?'
'한꺼번에 바나나를 다 먹을 수는 없으니까, 남은 바나나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다들 일단 냉동실에 넣으라고 했어. 근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냉동하면 어르신들 이도 안 좋은데 먹지도 못할 거 같아서 내가 남은 바나나를 다 집에 가지고 갔어.'
'아…그래요?’
'2~3송이 정도. 무거웠지. 그래도 우리집이 용산이라 그렇게 멀지는 않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네...'
'어쨌든 바나나를 집에 다 가지고 갔는데 지금 책임님들이 바나나를 급하게 찾아. 특히 영숙 책임님이...나한테 계속 그 바나나 가져오라고 화내시고 그래서... 네가 먹었다고 했어.'
'네? 저요?'
'응...그러니까 지금 책임님한테 와서 바나나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한 마디만 해줘.'
'제가 왜요...언니...왜 그렇게 말했어요...?'
'제발...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안 그래도 나한테 화 많이 내시는 분인데 내가 집에 바나나 다 가져갔다고 하면 혼날까 봐... 어쩔 수가 없었어.'
'언니...전 바나나 아예 먹지도 않는데...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제발...해줄 거지?'
정말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바나나를 좋아하지를 않아서 누가 바나나를 줘도 절대 먹지 않는다. 평생 먹지도 않았던 바나나인데...그걸 맛있게 먹었다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니! 한층 더 억울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내가 확답을 주지 않자 바나나 언니는 내 자리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내 앞에 찾아온 바나나 언니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고 살짝 보이는 이마에는 땀도 맺혀 있었다.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았기에 결국 알겠다고 했다.
“언니, 근데 진짜 제가 가서 인사드려야 해요?”
“너 지금 와서 말 바꾸면 어떡해? 책임님께 다 말했는데. 네가 먹은 바나나에 대해선 고맙다 해야지.”
“(내가 먹은 바나나라고?) 네? 바나나 안 먹었는데 언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빨리 가자.”
억울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용기 내서 영숙 책임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책임님, 저 김현수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바나나를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요.”
용기 내서 감사 인사를 드렸지만, 책임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음속에 작은 응어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메신저로 13층 언니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13층 언니는 “헌팅포차에서 남자친구 만났다며?”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바나나 언니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상태였기에, 나의 말에 크게 공감해주며 다시는 바나나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꼭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같은 본부에 있는 죄로 바나나 언니와의 접촉을 피하기가 어려웠고 작고 소소하게 억울한 일들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얼마 뒤, 바나나 언니가 참석하지 않은 인턴 동기들의 모임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다들 소현 언니랑 친한 사람 있어? 그 언니 어때? 괜찮아?"
"그 누나 왜?”
"사실, 그 언니 좀 이상해. 얼마 전에 나한테 자기 팀에 와서 바나나 고맙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가라고 해서, 가서 인사하긴 했는데 좀 기분이 그렇더라. 완전 짜증 났어."
동기들과의 대화에서 바나나가 언급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는데…이게 무슨 일이람?
"바나나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바나나 얘기를 했다고? 혼란스러워하던 찰나, 또 다른 동기의 증언이 이어졌다.
"너한테도 그랬다고? 그 누나 나한테도 그랬는데?"
동기 중 다섯 명 이상이 ‘바나나를 잘 먹었고 고맙다.’고 말하고 가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들은 갈등하다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모두 그 팀을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이렇게 착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나 싶은데, 사실 나도 쭈뼛거리며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전했으므로 할 말은 없다.
동기들과 나는 모두 어이없었다.
바나나가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아니면 영숙 책임님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걸까?
언니에게 당한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어 하기는 했지만 ‘근데, 인사하러 갔을 때 영숙 책임님 표정 진짜 무섭지 않았냐?’를 끝으로 그 사건은 그날의 안주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결코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