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의 달리기

덴버에서

by 래미

돈 이야기를 한다고 하셔서 긴장하며 읽었습니다. 제가 자주 미끄러지는 이야기라서요. 저는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 욕구를 감당할 만큼의 돈은 있었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가진 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욕구를 가진, 운 좋은 사람이었달까요. 돈이 지나치게 많아 권력을 누려본 적도, 돈이 지나치게 없어 부당한 대우를 받아본 적도 없기에 돈의 힘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답답해하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저를 이상주의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편지를 주셨으니, 답을 시도해 볼게요. 너무 답답해하지 않으시길 바라면서요.


어릴 적 저는 우리 집이 ‘대체로 가난하다’라고 생각했어요. 교실 안에서 아이들 무리에 잘 끼지 못하는 편이었는데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행하는 옷이나 머리 모양, 당시의 명소, 프랜차이즈 식당에 새로 생긴 메뉴 등이 그것이었죠. 알아듣지 못했던 이유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인식의 필요조건이잖아요. 이런 경험엔 ‘돈’이 필요했어요. 원하면 부모님이 기꺼이 주셨을 테지만(아마도요?), 제가 보기에 그런 경험은 우리 집 형편엔 사치 같았습니다. 부모님 대화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돈 없다’라는 말의 학습 효과였을까요. 그러니까 ‘대체로 가난하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죠. 아이들이 누리는 경험을, 나는 마음 편히 누릴 수는 없다. 그 정도의 가난한 느낌.


동시에 ‘대체로 부유하다’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몇몇 어른들 덕분이었어요. 저는 어릴 때 피아노도 배웠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습학원도 다녔어요. 연이은 사업 실패로 빚을 갚아가기도 벅찬 형편에 제가 그럴 수 있었던 건, 피아노 학원과 보습학원의 원장 선생님들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돈’이 아니라 그분들의 ‘도움’으로 학원에 다녔어요. 미리 주는 장학금이라며, 배움을 나눠주셨거든요. 학원의 열쇠 꾸러미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연습하라고, 언제든지 공부하라고 자리도 내주셨고요. ‘돈’이 있어야만 할 것 같던 경험을, ‘돈’ 없이도 해 본 경험이었죠. 그때 제가 받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적어도 이자까지 더해 은행과 카드사에 빠짐없이 갚아야 하던 빚과는 차원이 다른, ‘갚을 수 없는 빚’이란 건 어린 저도 알았습니다. 고마운 마음과 달리 쭈뼛거리기만 하던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 분이 계셨어요.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니가 찾아온 거다. 나중에 니를 찾아오는 사람이 또 안 있겠나.” 어린 제가 그 어른들께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생각한 건, 제가 받은 게 ‘선순환’의 일부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받은 걸 선순환하고 있는지, 누군가 찾아올 법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지, 문득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제가 이상주의자가 된 게 아닐까요. 돈으로 할 수 없는 진짜가 있다고 믿고, 돈이 휘두르는 힘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이요. 돈이 많지 않아도 ‘대체로 부유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던 덕분에 말이죠.


달리기를 통해 누리는 기쁨에 어떤 값을 매겨야 하는지. 선물 님의 질문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그랬어요. ‘그걸 왜 값으로 매겨야 하지? 그걸 어떻게 값으로 매겨?’ 이렇게 생각했어요. 달리기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그런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생각을 바로 제가 한 겁니다. 그런데 저처럼 반문할 걸 예상하셨더라고요. 제가 그런 답을 할 줄 알고 미리 써두신 것처럼.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그래, 생각이라도 해 보자. 혹시 환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해 보자!’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리처드 파인먼이 다음 세대에 전할 단 하나의 문장이라며 남긴 말이죠. 이런 원자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양자 역학’의 목표라고 해요. 양자 역학이란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건 비단 저만의 일은 아닐 텐데요. 그것은, 원자의 세계가 우리의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전 역학의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죠. 알맹이(입자)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가 소리(파동)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있는 것 같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계라고 하잖아요. 이 세계를 증명하는 대표 수식이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하던데요. 이 수식엔 한 가지 흠이 있었다는데, 혹시 알고 계셨나요?


방정식을 이루고 있는 한 숫자를 설명할 수가 없었대요. 바로 제곱해서 -1이 나와야 하는 수 i, 허수입니다. 슈뢰딩거는 이 허수와 실수의 합으로 이루어진 복소수를 통해 원자 내에서 전자가 존재할 확률을 계산하는 데 성공해요. 그러나 허수의 이름만 봐도, 현실 세계에선 인정받지 못한 느낌이 들어요. Imaginary Number, 상상의 수라니요.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웃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체셔 고양이를 통해 허수를 조롱했다고도 하죠. 그럼에도 이 상상의 수, 허수가 없이는 양자 역학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 기술과 공학의 토대가 되고, 휴대전화, 컴퓨터에 들어가는 반도체 원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현대 물리 이론을 보이지 않게 지탱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허수 i라는 것이죠.


자본주의가 돈에 매긴 가치는 ‘실수(Real Number)’의 영역이라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엔 실수보다 더 많고 깊은 ‘허수(Imaginary Number)’의 영역이 존재하지요. 그것이 이 세계를 지탱합니다. 어릴 때 받은 선순환의 일부가 ‘대체로 가난하다’라는 생각과 ‘대체로 부유하다’라는 생각 사이를 오간, 저의 세계를 지탱해 온 것처럼요. <학원을 끊고 유럽을 걷다>에 쓰신 여행의 순간도 허수의 영역이 아닐까요? 마드리드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린 선물 님이 경찰서에서 따님의 얼굴을 쓸어주고 머리를 다시 묶어주던 순간 같은 것이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 같거든요. 명품의 가치 역시, 허수의 영역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명품의 가치를 온전히 누리기보다, 그 가격으로 자신의 가치를 대변하려는 오용 때문에 지나치게 비싼 값이 매겨진 것으로 생각해요. 그것과 별개로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지 않고, 이익 창출에만 혈안이 된 기업의 이기심엔 정말이지 동조하고 싶지 않네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안 삽니다, 그런 명품!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드려볼게요. 제가 달릴 수 있는 모든 길이 공사 중이라 달릴 수 없고 그에 대한 보상금을 받게 된다면, 얼마를 받을 것인가. 제 답은 간단합니다. 공사 중인 길이 아닌 길을 찾을 것이고, 보상금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길이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으신다면, 몇 년 전 제 경험을 말씀드릴 거예요. 집 주변 모든 길이 달릴 수 없었던 시간을 이미 지나왔거든요. 선물 님도 아마 겪었던 걸로 기억해요. 우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입니다.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 확산. 마스크를 벗고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시간을 기억하시겠지요. 2018년부터 치동천을 달렸던 저에겐, 시에서 하는 공사보다 더 날벼락같은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달리던 걸 포기할 수 없어서 마스크를 쓰고 달려보기도 했어요.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더라고요. 마스크 대란까지 합세하면서 땀을 적실 여분도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길은 열려 있었지만 심리적인 길이 모두 막혔던 그때, 달리는 길도 사방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선물 님은 길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저 역시 궁금해지는 순간인데요. 저에게 길은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입니다. 방금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갈 수 없는 심각한 길치인 저에겐 ‘길’이라는 명사와 ‘찾는다’라는 동사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예요. 비단 물리적인 길만 그런 게 아닙니다. MBTI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진 않지만, ‘J : P = 10 : 90’인 저는 사건이 코앞에 닥쳐야 그 실체를 이해하고 그제야 사건을 뚫고 나갈 방법을 찾는 식입니다. 사방이 막힌 막막한 순간의 해결법 역시, 무작정 찾아야만 하는 길인 것이죠.


저는 달리기 길을 17층 아파트 거실과 주방에서 찾았습니다. 치동천을 달리던 때와 달라진 건 양말과 러닝화를 신지 않았다는 것뿐이었어요. 달리기 앱을 켜고 맨발로 거실과 주방에서 원을 그리며 매일 5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나중엔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더라고요. 그걸 본 지인이 요가 양말을 주기도 했어요. 요가 양말엔 미끄럼방지가 되어 있거든요. 달리고 싶은데, 달릴 길이 없다면 그 길을 찾는 것까지 포함한 게 저의 달리기라고 말씀드리면, 역시 이상적인 걸까요. 그리고 어쨌든 달리게 되었으니, 보상금은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너무 답답하실까요.


제 달리기 가격이 얼마인지 막 계산을 끝냈어요. 음, ‘1,198 + 1,018i’네요. 1,198은 2018년 6월 18일부터 현재까지 제가 달린 날의 수이고요, 1,018은 달리지 못한 날의 수입니다. 달리지 못한 날도 달린 날 못지않게 달리고 싶었던 마음, 달리진 못했어도 일상으로서의 뛰기는 멈추지 않았던 시간, 달리지 못해서 달리기를 더 많이 생각했던 그리움까지. 이런 게 모두 허수 i 앞에 담겨 있습니다. 저의 달리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세계를 지탱해 주는 허수가 포함된 복소수더라고요. 선물 님은 이 복소수에 어떤 가치를 매겨 주시겠습니까?


아, i를 필기체로 쓰니, 작은 아이가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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