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지우는 달리기

동탄에서

by 래미

아름드리 조경수 가지를 부러뜨리고 뽑아버릴 정도로 무거운 폭설이 내린 11월 말 이후, 한동안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 가뭄을 걱정하던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연휴에 느닷없이 쏟아진 폭설이라 치동천 한쪽 길엔 그대로 눈이 쌓여 있어 달리다가 몇 번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울퉁불퉁 사람들의 발자국 모양대로 얼어붙은 곳도 있고, 생눈 밟힌 자리가 녹아 흐물흐물해진 곳도 있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미끄러질지 몰라 살살, 천천히 8km를 채워 달렸습니다.


단선 멜로디 같은 겨울 치동천 길도 이렇게 미끄럽고 조심스럽게 달려야 하는데 공원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광활한, 눈이 내려 길하나 보이지 않는 그런 날 체리 크릭을 달리셨다니 저로서는 그 담대함이 어떤 마음인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지평선까지 산하나 보이지 않는 그런 드넓은 곳을 달려보는 일을 저는 꿈꿉니다.) 래미 님은 눈에 덮인 하얗고 평평한 평화로움에 매료되었던 것일까요. 분명히 저 눈 아래에는 어떤 길과 틈이 있을 것이고, 그걸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못 달렸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눈이 내리는데 어제의 울퉁불퉁함을 기억하는 저는 오늘 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으니, 저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길을 잃는 것은 괜찮지만 나의 달리기를 망칠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에 뇌가 지배당하면 우리는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경험에 의해 조건화된 상황에서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에서 유발되는 두려움이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어내는데 그 속도가 무려 0.01초라고 합니다. 생각을 멈춰 세울 틈도 없이 날아온 강속구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죠. 제가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자주 들은 말이 "네가 뭘 제대로 하겠냐?" 하는 말입니다. 손재주가 없어 동생은 잘 만드는 스케이트를 저는 만들지 못했고, 그림, 음악, 운동 등등 제가 봐도 뭘 하나 잘하는 게 없었습니다. 외모라도 출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저 그런 얼굴에, 작고 왜소한 체격, 눈에 띄게 잘하는 공부도 아니었어요. 잘하는 게 있다면 그저 순종하고 착하게 사는 것 (정확히는 착하다는 말을 듣도록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십수 년간 어떤 어려운 일을 앞둔 상황에서 그 말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네가 뭘 제대로 하겠냐. “


잘 아시다시피 저는 여행을 한 번 가도 별의별 일을 다 겪고 오지 않습니까. 잃어버리고, 소매치기당하고, 헤매고, 틀어지고. 나름 계획을 한다고 해서 가는 여행인데도 남들은 잘 겪지 않는 별의별 희한한 고난을 겪고 돌아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여행이 그럴진대 하기 싫은 일은 어땠겠습니까. 작성한 문서 안에 오탈자가 들어앉은 것은 기본이었어요. 제가 맡은 업무나 행사를 기획해 진행할 때도 온갖 실수와 실책이 쏟아졌습니다. 일이 꼬이고 여기저기서 뻥뻥 구멍이 터지고. 정말 사소한 것도 틀리지 않고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창피했고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자책감이 크게 들었습니다. 운동 경기를 해도 이상하게 제가 속한 팀은 꼭 지거든요. 지금도 운동 경기할 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우리 팀이 또 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 반응으로 따라와 두렵습니다. 정말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과 확신을 그네처럼 오갑니다. 여러 주변 사람의 도움과 저의 실수를 따뜻하게 감싸준 아량이 없었다면 오늘날 저는 보통의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방에 박혀서 나오지 않는,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불안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하니 남자인 저는 확실히 그랬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크고 선명한 구멍 그 자체인 셈입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강을 막아 놓은 콘크리트 보가 있었습니다. 그 보를 오가며 낚시도 하고, 강 건너 섬의 숲으로 가 놀기도 했습니다. 보 중간에 물이 흐르도록 만든 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허칸'이라 불렀어요. 동네 아이들 모두 그 허칸을 풀쩍풀쩍 잘 뛰어넘었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 무섭더라고요. 꼭 저 허칸을 넘지 못하고 정강이가 허칸 모서리에 찍혀 발이 빠질 거 같고, 물살에 휩쓸려 무서운 보 아래 깊은 곳에 빠질 거 같아 뛰어넘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만 있는 저를 기다리다가 다른 아이들은 가 버렸어요. 그걸 뛰어넘지 못하고서는 아이들하고 놀 수도 없었고 어떤 날은 학교도 오갈 수 없었어요.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허칸이 좁아 보이는 겁니다. '어? 이 정도면 뛰어넘을 수 있겠는데?' 싶더라고요. 붕~하고 날아서 펄쩍 뛰었더니 넘어지는 게 아닙니까. '아니, 이게 이렇게 쉬웠다고?'가 아니라 '우와 나도 되네. 나도 이제 여길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 하면서 얼마나 기쁘던지요. 다른 아이들이 들으면 코웃음칠 일이지만 저는 그게 그렇게 기쁠 수 없었어요. 그다음부터는 훅훅 뛰어 날아 넘어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6학년 때 우리 반 선생님(두 번째 책에 썼던 그 양념치킨 선생님입니다.)께서 학년말에 우리가 쓴 글을 모아 학급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학급 문집 표지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내라 하셨는데 그림에 소질이 정말 없는(첫 월급을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미술학원 등록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재미있어하는 놀이를 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연필로 그려 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왔더니 반장이 저에게 제 그림이 표지 그림으로 뽑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놀랐죠. '내 그림이? 왜? 정말?' 학급에 보면 그림 잘 그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교사인 제가 보기에도 감각이 남달라요. 한 반에 50명쯤 되었으니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기에 당연히 제 그림은 탈락일 것이고 뽑힌다는 생각이나 기대 자체가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린 그림은 '오징어 게임'이었습니다. 진 누런색 표지에 선으로만 그려진 <오징어게임 하는 우리 반>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실린 표지였던 그 문집을 아직 기억합니다. 다 지워진 어린 시절 기억 중 이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은 이유는 내가 나에게 작용한 어떤 '부심(負心)'의 느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두려움을 이기고자 하는 사고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느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생각에 동반되는 부심의 느낌. 내 효용의 가치가 드러났을 때 얻는 자부심이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부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가치가 나타나는 부심으로서 내가 쓸모 있는, 인정받아야만 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죠.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흔한 것이겠지만 요즘은 매운 것을 잘 먹는 사람들이 일부러 남들은 도전하기 어려운 매운 것을 먹는 맵부심, 여행을 많이 다녔음을 드러내는 여행 부심, 심지어는 욕 부심도 있다고 하니요.


언젠가 그렇게 말씀하셨죠? 달리기 하는 내가 좋아서 달린 적이 있다고. 저에게 달리기도 그런 부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기 하는 내가 좋아서. 스스로 호감형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불안과 두려움을 덜 느낀다고 합니다. 이때 느끼는 것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기에 느낌이 아니죠. 정말로 그렇게 믿으려면 하나의 생각에 최소 일곱 번의 느낌 자극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달리는 것이죠. 또 달리고 나서 벤치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쉴 때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있잖아요. 이때 활성화된 편도체를 가라앉히고 내면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할 때도 있어요. 여전히 저는 너비를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삶을 구멍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저에게 달리기라는 것은 남들 몰래 그 구멍의 경계를 지우는 의식이나 수행 같은 것입니다. 물론 제 스스로 작은 일에도 정성을 쏟아 성실히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겠지만 대책 없이 솟아나기만 하는 구멍이라는 느낌, 즉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달리기가 주는 나만 아는 '부심' 느낌을 통해 경계를 조금씩 흐리게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디가 구멍인지, 어디가 구멍이 아닌지 알 수 없게 되니까요.


치동천에는 여전히 눈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니 발바닥이 더 피곤하고, 한 발 한 발 중심 잡기도 어려워 몇 번이나 휘청대는 몸을 잡고 달렸습니다. 이렇게 펑펑 폭설이 내릴 겨울도 한 달 후엔 졸졸 흐르는 물소리로 남게 되겠죠. 오늘 같은 길을 달릴 일은 내년이나 되어야겠지만, 계절의 구분처럼 구분되지 않는 연속적 시간의 흐름 위에 또 어떤 울퉁불퉁한 일들이 삶을 기우뚱하게 만들지 모르죠. 그럴 때는 아주 작은 것에 정성을 쏟아봐야겠습니다. 또 처음부터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성공하려는 의지 없이 '시도하지 않는' 것은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줄이려 했던 지금까지의 행동 패턴 극복을 위한 노력 수단으로 치동천을 달리며 구멍의 경계가 흐려지도록 열심히 지워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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