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달리기

덴버에서

by 래미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 스마트폰을 열었던, 긴 겨울을 지나온 탓일까요. 전해주신 치동천 봄꽃 소식이 어느 때보다 반가웠습니다. 목련은 물론이고 매화, 살구나무꽃이 저문 자리는 이제 여린 초록들로 채워지고 있겠어요. 망울로 꽃샘추위를 견디던 벚꽃도 언젠가 선물 님의 말대로, 붓 자국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을 테고요. 특히, 개나리 만개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지난겨울 한국에 갔을 때, 치동천 변 개나리가 심하게 가지치기당한 모습을 봤거든요. 올봄 꽃이 피기나 할까 상심했었는데, 무사히 꽃을 피우고 있다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덩달아 노래 하나가 생각났어요.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로 시작하는, 그 노래요.


선물 님, 혹시 고무줄놀이를 해보셨을까요? 시골에서 '소년'으로 자란 선물 님은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놀이를 했을 법도 한데요. 저는 고무줄에서 좀 놀아본 아이였습니다. 대체로 의자 생활을 즐기던 편이었지만 고무줄놀이엔 꼭 끼워달라고 했어요.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입고 뛰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시크한 사춘기 시절에도 고무줄놀이의 매력은 꽤 컸던 모양입니다. 고무줄놀이는 높이에 따라 단계가 있는데요. 우리 동네에서는 발목, 무릎, 엉덩이, 허리, 가슴, 목, 귀, 머리, 주먹 하나, 한 뼘, 두 뼘, 만세, (깨갱 발을 들고 만세를 하는) 만만세의 단계가 있던 걸로 기억해요. 양쪽에서 두 명이 각각의 높이로 고무줄을 잡으면, 반대팀 주자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동작을 완수해 나가는 놀이였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 중 하나가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로 시작하는 노래였어요. 찾아보니 제목이 '꼬까신'이네요. '꼬까신'은 ‘엉덩이 단계’에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단계였죠.


얼마 전, 한 팟캐스트에서 ‘몰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작가의 <몰입의 즐거움>에 나온 말이었는데요.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래요. 엉덩이 단계가 저에겐 이랬던 것 같아요. 고무줄을 잡는 아이들은 대부분 저보다 키가 컸거든요. 키 큰 아이들의 엉덩이에 걸린 고무줄을 박자에 맞춰 밟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았죠. 조금만 더 높이 뛰고, 조금만 더 집중하면 가능한 정도였달까요. 그래서인지 '꼬까신' 노래만 나오면 저는 작정한 듯 열심히 뛰었어요. 뛸 땐 좀 힘들지만, 성공하고 나면 성취감이 최고였거든요. 그 책에 따르면, ‘몰입의 즐거움’은 몰입한 순간이 아니라 몰입이 끝난 다음에 오는 거라고 해요. 엉덩이 단계를 통과한 성취감이 저에겐 몰입의 즐거움이었던 걸까요? 그것 때문에 고무줄에서 계속 뛰었던 걸까요?


지난달부터 콜로라도 한인 몇 분과 함께 달리고 있어요. 체리 크릭 공원을 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 내어 나가 본 것이었는데요. 처음 인사를 나누는데 어찌나 데면데면하던지요. 닉네임과 달리기 경력을 주고받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채팅방에서 편하게 나오던 말도, 얼굴을 마주하니 참 어색하더라고요. 게다가 친해지려는 노력조차 아무도 안 하는 게 아니겠어요. 한국에서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애쓰는 사람을 볼 땐 왜 저렇게까지 하나 불편해하곤 했는데, 막상 모두 다 쿨하니까 누구라도 애를 좀 써줬으면 싶더라고요. 용기 내어 겨우 꺼낸 날씨 이야기가 허공으로 흩어질 땐, 프레리도그를 따라 땅굴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뭐 이렇게 냉랭할까. 참 덧정 없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한 마디 더 건네볼까 싶다가도 ‘내가 왜?’하는 마음에 널을 뛰었어요.


달리기 경력도 제각각이었습니다. 20년 넘게 달린 분도 있었고, 풀 코스를 좋은 기록으로 여러 번 완주하신 분도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트레드밀에서 달린 것까지 합쳐도 스무 번이 안 되는 분도 있었고요. 최대 달린 거리가 5킬로미터인 분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처음 달리러 나오신 분도 있었죠. 각자의 페이스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했어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달릴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달리는 게 재미있기는 할까요? 달리기 표정은 날마다 달라서 오늘 내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어느 거리만큼 달릴 수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나의 달리기도 달려봐야 아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 너무 멀어지지도, 너무 가까워지지도 않게 달릴 수 있을까. 아, 괜히 나왔다. 조용히 혼자 달릴걸. 마음이 참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간편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어요. 다시는 안 나와!


우리는 체리 크릭 호수를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했어요. 12킬로미터쯤 되는 거리인데, 제 옆에서 달리던 분이 5킬로미터쯤에서 못 달리겠다 하시더라고요. 저는 끝까지 달리고 싶은데, 난감했습니다. 버리고 가야 하나, 같이 멈춰야 하나 갈등했죠. 다행히 우리가 선두 그룹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습니다. 뒷사람들이 올 때까지 쉬어 보자고요. 그렇게 우리는 호수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달려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데, 자꾸 웃음이 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팔을 들어 펼친 제 손바닥에 누군가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습니다.


모두가 벌게진 얼굴로 땀 흘리며 웃고 있었어요. 헐떡이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우리가 달려온 길 위의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었죠. 길을 헤맨 이야기, 오르막의 고단함, 내리막의 시원함, 그리고 앞과 뒤에서 바라본 서로의 모습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었어요. 냉랭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친숙한 얼굴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했던 생각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짐작이 될까요. 콜로라도 한인들을 싸잡아 '정나미 없다'라고 일반화시키려던 제 생각이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들 뒤로 짙푸른 하늘이 광각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장난꾸러기 같은 꼬마 구름 몇 점이 동그마니 떠 있었고요. 땅굴 밖으로 나온 프레리도그가 두 발로 선 채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프레리도그가 우리를 봤을 리 없어요. 태양을 보았겠죠. 제 기분이 그랬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 같은 기분. 30분 정도 같은 길을 달려온 것뿐인데, 제 기분이 왜 그렇게 달라진 걸까요? 그 얼굴들이 왜 그렇게 친근해 보이고, 왜 자꾸 웃음이 났던 걸까요? 어쩌자고 하이 파이브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냔 말이죠. 극 내향인인 제가요!


제가 고무줄놀이의 중요한 규칙을 말씀 안 드린 것 같아요. 가장 높은 단계인 만만세를 통과하면 놀이가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발목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요. 겉으로 보기엔 두 팀으로 나누어 대결하는 모양새였지만 사실은 무한반복하는, 승패 없는 놀이였어요. 고무줄을 도구 삼아 다 함께 노래 부르고 뛰어놀기 위한 시간이었달까요. 엉덩이 단계에서 성취를 위한 몰입을 즐긴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고무줄놀이의 진짜 매력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취를 위한 몰입이 목적이었다면, 저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기를 선택했을 겁니다. 고무줄에 뛰어들진 않았을 거예요. 실패 확률이 높은 허리, 가슴, 목 그 이상의 단계에서 있는 힘껏 뛰지도 않았을 테고요.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노는 시간. 그 시간을 온몸으로 누리고 있다는 감각적인 기쁨. 이 순수한 즐거움이 고무줄놀이의 참 매력이었습니다. 그 매력에 빠졌던 덕분에, 어둡고 우울한 줄만 알았던 사춘기 시절 한구석에도 ‘꼬까신’ 같은 봄날의 한 장면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그날 체리 크릭 공원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저를 흥분시킨 것도 그와 닮은 것이었어요. 얼마의 거리를,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그런 성취와 상관없이 우리가 함께 놀고 있다는 순수한 즐거움이요. 어쩌면 진정한 몰입의 즐거움은 함께 노는 순수한 시간, 그 자체인 건 아닐까요.


12킬로미터를 함께 완주하고, 집까지 남은 4킬로미터를 더 달려왔어요. 그 길 위에서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친구에게 맞고 온 동생에게 누나가 너도 때리라고 하던 장면이었는데요. 왜 바보같이 맞기만 하냐고, 속상해하는 누나의 마음에 저 역시 금세 동화되었더랬어요. ‘상대가 힘이 더 세면 어쩌지? 그러다 또 맞으면?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동생이 이렇게 말해요.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다시는 안 나와!’ 저의 이 다짐에 숨겨진 진심이 동생이 한 말 같았어요. 무리 속에서 어울렁더울렁 놀고 싶은데, 냉랭한 표정의 사람들이 마치 저를 내치는 것 같아 저 혼자 날을 세웠던 거예요. 같이 놀고 싶단 말을 못 해서 모난 말로 관심을 끌려는 속셈. 친한 사이였다면 실제로 모나게 굴었을지도 몰라요. 하긴, 안 놀아주면 골이 나긴 하죠. 놀이의 즐거움은 본능이니까요. 영화에서 동생을 때린 친구도 어쩌면 골이 난 제 마음 같았던 건 아닐까요. 우리는 왜 같이 놀자는 말을 이렇게 어려워할까요? “누구야, 노올자~!” 하던 어린 시절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애먼 말로 자신을 찌르고, 타인을 찔렀던 저의 한 장면을 돌아본 시간이었습니다.


승패도 없는 무한 반복의 고무줄놀이는 대체 언제 끝났냐고요? 저녁 밥상을 다 차린 엄마들의 고함이 들려올 때쯤이요. 이름이 불리는 순서로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어요. 그렇게 마침표도 없이 놀이는 페이드아웃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 날 그 놀이는 시작됐어요. 누군가의 “노올자!” 하는 외침과 함께요.


그러고 보니 선물 님은 고무줄 끊는 놀이 같은 건 안 했을 것 같아요. 고무줄을 끊으려면 타인의 희로애락을 잠깐 모른 척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 한 구절에 마음의 빗장이 와락 열리는 사람은 그런 걸 모른 척할 순 없을 것 같거든요. 시인이 건넨 감정에 공감하고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대학생이 될 아이는, 고무줄을 끊을 순 없었을 겁니다. 그런 아이가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모를 리 없잖아요. 아! 그 아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 한 권이 생각났어요. 그 책을 치동천 끝자락에 있는 작은 책방에 맡겨 둘게요. 선물 님이 그 책을 찾아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하늘이 맑고 푸른 날에요. 그러기에 참 좋은 책이거든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이에게 전해주세요. 너는 이다음에 자라 멍울진 시간을 통과한 어떤 사람의 작은 선언에도 공감 어린 격려를 건네는 따뜻한 어른이 될 거라고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편지를 마치려고 보니, 선물 님이 말씀하신 만개를 준비하던 개나리가 치동천 개나리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드네요. 아파트 단지나 학교 담장에서 보신 개나리일 수도……. 이런!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까요? 말씀하신 개나리가 치동천 개나리면 좋겠습니다. 그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에서, 선물 님과도 신나게 달려봐야죠. 아차차, 치동천 개나리는 천변길 아래로 피어나죠. 그럼, 개나리 노란 꽃그늘을 바라보며 함께 달리는 걸로요. 그런 봄이 오길 기다리며, 오늘 밤은 깨지 않고 잠들어 보겠습니다. 부디!

이전 10화경계를 지우는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