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탄에서
이즈음이면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따사로움이 흐르는 풍경에 마음이 설렙니다.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걸까요. 치동천 풍경 역시 지난달과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연 저 생명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려 나갔던 나무에도 잎이 열리고, 풀과 나무들도 그 자람 속도에 감탄할 정도로 빠르게 무성해졌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돌 스냅사진을 찍는 가족의 얼굴에서는 행복을, 데이트하며 나란히 걷는 커플의 잡은 손에서 새어 흐르는 달곰함을 제가 맛보며 달립니다. 또 수변 상가 앞에 새로 조성된 놀이터는 아이들의 노는 풍경으로 풍성해졌습니다. 무엇보다 달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함께 발을 맞추며 인생을 맞춰가는 부부, 서로를 응원하는 소리로 달리는 가족,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병사들 같은 크루들까지. (저 크루들을 보면 왠지 지고 싶지 않아 이들과 지나칠 때는 더 빨리 달립니다.) 달리기 좋은 시간 때는 부딪히지 않도록 앞사람을 살펴 가며 달려야 할 정도입니다. 이 많은 사람이 지난겨울에 다 어디에 있다가 나온 것일까요.
변하지 않는 여전한 풍경들도 있습니다. 저녁 시간엔 치동천 끄트머리에 가까운 5번지 식당의 생선구이 냄새도 여전히 풍겨오고, 11자 상가 근처의 중국집에서 짜장 볶는 기름 냄새는 달리다 말고 가서 한 그릇 먹고 가고 싶게 합니다. 래미 님이 궁금하던 무릎 아래까지 베어진 그 초록색 식물은 잎 역시 새봄의 힘으로 무성해졌지만 아직 그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몇 년을 살았을 여러해살이 풀일 텐데도 여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치동천을 뛰는 세 번째 봄임에도 나만의 생각에 갇혀 달렸구나 싶습니다.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내 안에만 갇혀 달린 이유 중의 하나는 '달리고 있는 나'를 바라봐주는 타인의 시선을 갈구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들보다 멋지게 달리고 있는 나(크루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 더 빨리 달리려는 것)를 보고 있는 어떤 상상의 시선을 만들면서 '나는 지금 멋지게 달리고 있는 거야.'라며 말이죠. 그 어떤 누구도, 아무도 저를 보지 않는데 말이죠.
2016년 첫 유럽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는 젊은 부부가 하는 취리히 근교의 공항과 가까운 에어비앤비였어요. 다음 날 아침 비행기라서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우리가 떠올리는 스위스 풍경보다는 현대식 신도시에 가까운 아파트였습니다. 아파트라고는 해도 한국의 아파트와는 사뭇 다릅니다. 낮은 5층 정도 건물이었고, 여느 유럽식 주택처럼 아파트 가운데는 중앙 정원이 잘 가꾸어진 테라스 아파트였어요. 에어비앤비는 주인이 적어 놓은 집에 대한 설명을 잘 읽어봐야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게스트가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 설명을 읽다 보니 놀라운 부분이 있더라고요. 게스트는 자신들이 준비한 바베큐를 함께 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어요. 사실 그 집을 택한 여러 이유 중에 그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 유럽 현지인의 집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생생한 속살을 느낄 수 있다는 첫 유럽 여행의 기대감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이었거든요.
집주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였는데 정말 친절했어요. '자기의 퇴근이 늦어질 것 같다. 직접 맞아 줄 수 없고, 열쇠는 어디 어디에 두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열쇠를 둔 우편함 안에는 미안함이 담긴 쪽지까지 적어 두었더라고요. 막상 도착하니 서둘러 퇴근했는지 주인은 있었죠. 종일 취리히를 구경하고 도착하느라 저도 늦게 도착했고, 저녁 시간이 되었던 터라 주인이 바로 테라스에 큰 바베큐를 준비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주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근처에 식당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약간 당황해하며 근처에 식당 몇 곳을 알려주면서도 우리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다고 다시 말하더군요. 저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가서 참 맛도 없는데 비싼 취리히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홧홧하면서도 묘한 패배감을 맛보면서 말이죠. 예상하지 못했던 저의 거절에 불편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을까요. 참 친절했던 주인 부부는 저와 한 거실에 있었는데 말 한 번 걸지 않더라고요. 저는 왜 그랬던 걸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의 영어 실력은 쓸만했고, 취리히로 오기 나흘 전 뮌헨에서 저는 올라프와 그토록 친절한 환대 속에서 이틀 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말이죠.
그때 거절이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마음에 남았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편치 않았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 거절은 진심이 아니었고, 나는 함께 하고 싶었고, 당신들이 준비한 저녁과 그 테라스 정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고. 아마 주인이 한 번만 저를 더 붙잡았더라면 저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얄팍하고 으스러지기 쉬운 마음이었는데 저는 왜 그랬을까요. 올해로 꼭 10년 전의 일인데 여전히 그때의 제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왜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할 때가 있잖아요. 내가 아닌 나를 나인 척 연기하는 거죠. 그 연기에는 분명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 텐데 연기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사람은 어떤 현상에 대해 이해와 해답을 알고자 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잖아요. 병에 걸린 사람도 병명을 알고만 싶고,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듯이요.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나를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시선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시선이 욕망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행동을 하게 되는 거죠. 그 시선이 욕망하는 바는 타인의 것일 수도 있고 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를 만들었던 로마 황제 초대 아우구스투스가 임종을 맞으며 "어땠나? 내 평생의 연기가.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야 하니 박수를 쳐 주게."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최고 통치자였기에 그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통치자의 연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저의 연기 행동의 목적을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기억과 마음을 그러모아 어슴푸레하게나마 답을 찾아보면, 좀 더 솔직히 말해 답을 쥐어 짜내보면 내 여행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고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호의를 멋지게 거절하고 '나 봐. 나는 나만의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라고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요. 참 우습습니다. 아무도 이 여행을 보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 본다 한들 그게 무슨 멋있는 행동이냐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 수치스럽기까지 합니다. 수치심은 자각의 문제거든요.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혹은 스스로 많은 기대를 하면서 그 기대가 다 이루어져야 하고, 그걸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만든다고 합니다. 저의 기대는 주인이 한 번 더 나를 잡아주면서 더 친절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저녁을 함께하자'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었지 싶습니다. 즉 그런 담담한 표정으로 베푸는 그 정도의 호의에는 응답하지 않겠다는, 내가 원하지 않는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그 안에 나를 가둬놓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중심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인간 존재가 그렇게 되었을 겪을 어려움에 대해 정혜윤 작가는 '삶의 발명'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맹목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한 맹목, 주변 세계를 다르게 볼 기회를 막고, 자신을 새롭게 알 기회, 회복의 기회마저 막아버리는 것, 너무 자주 두려움에 빠지거나 공허하거나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너무 자주 우리 삶을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 바로 지나친 자기 중심주의다. 이 자기 중심주의가 세상을 성스럽게 경험하는 것을 막고, 세상을 풍요롭게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세상을 빈곤하게 경험하게 한다....(중략) "삶은 내 안에도 더 많은 삶을 탄생시킬 것이다. 더욱 다양한 관계와 경험을, 감사를, 아름다움을."
저 스스로 만든 어떤 기준 이하의 다정함으로 접근하는 것들에게 저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던 듯합니다. (뮌헨 에어비앤비 주인 올라프씨의 세심한 배려와 친절은 너무나도 제 다정함의 기준 이상이었던 거죠.) 그러니 살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저는 외면하고 모른 척했을까요. 그만큼 저에게 상처받았거나 실망을 했던 또는 무책임한 관계 역할로 인해 인생의 곤란을 겪었던 이들은 또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취리히에서의 호의를 통해 다양한 관계와 경험과, 감사와, 아름다움과 이어질 기회를 외면해 버리고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니체가 말한 대로 스스로에게 엷은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 버겁다 느끼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위치에 따라 해야 할 역할이 세 가지 이상을 합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나 남편으로, 아버지나 어머니로, 아들이나 딸로, 며느리나 사위로, 형님이나 동생으로. 몇 년 전부터 서점가에는 그런 역할들에서 벗어나 내가 정한 기준보다 더 깊고 큰 역할과 책임이라 여겨지면 신경 끄고 자유롭게 나 자신으로만 살아가라는 책들이 많이 팔리기도 한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요한 만큼의 관계와 연결조차 외면하고, 나 혼자만의 풍요로움에 취하면 결국 빈곤에 이르는 것은 '나'입니다.
내가 달리는 이곳의 풍경들이 때때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풀과 나무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싶습니다. 치동천과 저의 연결을 위한 내 중심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건 치동천과 함께 달리지 않은 것이죠. 래미 님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하신 치동천이 그리울 것 같다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많이 놀랐거든요. '치동천이 왜 그리워질까....' 그 이유를 이제야 미세한 떨림으로 알 것 같습니다. 내 중심을 탈피한 관계를 맺고 함께 달린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의 차이랄까요.
달리기의 목적이 뭘까요? 우리가 글로써 몇 번 이야기 나눈 듯합니다만 달리기는 건강을 위해, 뿌듯함을 위해, 몰입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 때론 그 자체로 그냥 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뿌듯함은 몰입할 때가 아닌 몰입이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죠.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시간이 나서 오는 사람과 시간을 내서 오는 사람' 처음 이 글귀를 보고 살짝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약속을 잡고 만나고,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건넨 사람들은 내가 시간을 내어서였을까, 시간이 나서였을까. 후자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맞추어 살았기에 풍경에 폭삭 빠져 달려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중심으로만 생각을 하니 시간이 없으면, 일이 바빠지면, 상대의 태도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계에 근심과 걱정이 발견될 때는 바로 외면해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부류의 관계만 맺고 그 정도의 마음만을 내어 일을 하니 그 일을 하지 않아도, 관계 연결을 끊어도 팽팽했던 탄성이 터지면서 찰싹하고 와서 삶의 얼굴을 때리고, 마음이 베이는 충격을 느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공명할 수 없었던 것이죠.
달리기의 목적은 자주 달리기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풍경에 폭삭 빠져 그냥 달리는 것이지 달리는 나를 객관적 시선으로, 타인이 나를 보고 있는 듯 시선을 창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간을 좀 내서 달려야 합니다. 물리적 시간을 내어야 몰입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몰입할 때 공명이 일어납니다. 시간을 내어서 만나고, 시간을 내서 일을 해야 더 집중할 수 있고, 잘할 수 있고 더 뿌듯할 수 있습니다. 월급이 소중한 이유는 내 시간과 바꾼 것이고, 시간은 곧 생명이니 월급은 내 생명과 바꾼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과히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미술사 강의를 듣는 일로 꽤나 피곤하고 지치는 요즘입니다. 참 재미있게 읽고 배우고, 알아가는 것이 즐거운 분야인데 시험공부로 대하려니 적잖은 스트레스가 되네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오늘도 시간을 내어 달려보겠습니다.
추신 : 일전에 말했던 치동천에 새로 심은 나무는 벚나무였습니다. 새로 심어진 그 마른나무에 꽃이 피기나 할까 하며 달리고 지나쳤습니다. 벚꽃은 잎 하나 없이도 피는 꽃이라는 걸 새삼 다시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