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달리기는 얼마짜리인가요?

동탄에서

by 래미

오늘은 돈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명품의 실제 제조비용은 판매 가격의 몇십 분의 일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돈이 많은 이들은 부자 정체성에 부합해야 하는 물건으로 여겨 당연한 듯 살 것이고, 적당한 수입이 있는 사람은 제법 큰 마음을 먹고 벼르다가, 그보다 적은 수입을 얻는 사람은 아끼고 아껴, 모으고 모아 사는 비싼 물건이겠죠. 실제 들어가는 돈의 값어치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사는 것은 그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 브랜드가 가진 우월적 가치를 자신에게 입히고, 부의 소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반대로 생각을 해 보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부가 없다는 뜻이고, 탐욕자본주의가 점점 더 확장하고 있는 세상에서 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본 획득 경쟁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연결 지어집니다. 모으고 모아 명품을 사서 들고 내딛는 발자국마다 '나는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나약한 당당함이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런 현상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렇게 부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돈'이 없으면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실업이나 질병, 재난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충분한 사회 안전망의 부재, 개인의 생활을 보살펴 줄 수 없는 낮은 사회 복지 등이 더욱더 '가지지 못한 자'의 이미지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빚어진 우리들의 모습으로도 비칩니다.


어떤 날의 달리기는 너무 힘이 듭니다. 3킬로미터를 달렸을 뿐인데도 숨이 차 오르고 다리는 무거워 나아가지 않을 때의 제 기분은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다가도 곧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섭니다. 헉헉거리는 숨을 느끼면서 '여기가 바닥이구나. 이제 더 올라갈 일만 남았네. 내 달리기가 더 강해질 수 있겠다'라는 긍정의 추를 마음에 하나 더 얹어 나를 두둔해 보기도 하고요. 이 마음 역시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조급하지는 않습니다. 뒤에서 탄탄한 몸과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따라오는 러너의 발자국 소리가 가깝게 느껴지면 곧 추월당하겠구나 싶습니다. 그때는 추월당해도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리면 된다라는 생각을 꽉 움켜쥡니다. 리듬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부상 방지를 위해 바른 달리기 자세와 호흡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이런 마음으로 달리면서 '나의 달기는 과연 얼마일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에 무릎 치료를 받을 때 한동안 못 달렸었지. 그때 150만 원쯤 치료 비용이 들어갔으니까 150만 원이라고 해야 하나.',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저 사람의 달리기는 더 비쌀 테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달리니까 값의 가중치를 두어야겠군.' 하면서 말이죠. 달리기를 값으로 매겨보려는 제 생각이 엉뚱한가요? 무형의 경험들은 값으로 매겨질 수 없다고 말들은 하지만 우리는 이미 무엇이든 값으로 매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달리기를 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으니까 질병 치료에 드는 비용을 상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형의 경험과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을 가장 먼저 반박하고 나서겠죠. 달리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다른 비싼 비용이 드는 취미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고, 즐거움을 얻었으니 그것도 값으로 환산되어야 한다고도 할 테고요. 항공편을 구매할 때도 직항이냐 경유냐를 놓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서 따져보지 않습니까? 그러니 달리기에 들어가는 시간 역시 기회비용으로 셈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자는 남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요.


연봉과 소득이 능력이고 능력이 정의의 잣대가 되었죠. 동물의 목숨뿐만 아니라 사람의 신체나 목숨 역시 그 정상(?)성에 따라 돈으로 환산되어 보상의 잣대가 되었고, 사랑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일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능력(돈) 있는 부모를 만난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언론은 재난의 참사 앞에서도 사람의 목숨값을 상처의 치유보다 먼저 계산해 보도함에도 대중들은 의아함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참사 안에서 '사람이 겪은 이야기'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가면서 대중의 관심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달리면서 본 것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겠네요. 치동천을 달리다 보면 뇌졸중 후유증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몸의 반쪽이 불편하신데도 제가 달릴 때마다 달리고 있습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또 어떤 아주머니는 어긋난 팔스윙으로 인해 상체를 쓰지 않는 불안정한 자세로 달리지만 그 표정만큼은 진지함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새벽에 달리는 날은 무리 지어 달리는 러닝크루들이 많이 보입니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뒤처져 있는 분들은 선두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러닝메이트가 되어 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달리기 안에 담긴 개별성의 이야기들도 돈으로 환산이 될까요? 앞에서 말했듯 가치가 돈으로 증명되고 인정받은 만큼 값이 매겨지는 것이라면 이런 이야기들은 값어치로 매겨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값은 표준 척도이면서 동시에 교환하거나 저장 가치가 있을 때 성립이 될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는, 지구의 사람들은 달립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달리기를 삶의 루틴으로 만들어 달리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시간을 쪼개어 내 달리고, 건강한 사람들은 더 건강해지기 위해 달리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건강해져 보려고 달립니다. 달리기를 통해 우리가 지어 입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고,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지만 달리는 기쁨을 어떤 값으로 매겨야 할까요. 값으로 매겨질 수 있다면 어떤 날의 달리기는 다리가 쑥쑥 앞으로 나아가고, 숨도 차지 않고, 기록도 좋으니 그런 날은 내 달리기 값어치가 쑥쑥 올라가고, 그 반대면 값이 다시 내려오는 것일까요. 마치 주식 가치의 등락처럼.


이런 엉뚱한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놔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값어치로 나의 달리기를 매겨지는 순간, 그 금액값에 따라 내가 이 달리기를 함부로 대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저렴한 것에, 싸구려에 나의 귀한 것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지 않습니까. '달리기는 나와 맺는 관계이며, 내 삶의 일부로 쓰이고 있는 시간이자 생각들인데 거기에 값을 매기려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려야 해'라는 생각을 방패 삼아 무엇이든 돈의 가치로 환산하려는 습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해 봅니다. 어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소비에 있어서도 경험과 관계에 더 큰 값어치를 매긴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날 예정이었던 2박 3일간 제주 여행을 여행사의 귀책사유로 못 가게 되었을 경우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금액이 얼마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행복감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큰 금액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하네요. 눅진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달리러 나가야겠습니다. '나의 달리기는 얼마를 받아야 할까'라는 이런 삿된 생각을 지우기는데는 달리기가 또 제격이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공사로 인해 래미 님 집 주변에 달릴 수 있는 모든 길이 폐쇄 되어 한 달간 달리기를 못 하게 되었습니다. 시당국은 래미 님에게 보상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한 달간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 금액으로 얼마를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 집니다. 래미 님의 달리기는 얼마짜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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