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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Nov 22. 2024

마흔 하나를 지탱해 주는 뿌리

"물이 너무 안 내려가네?" 일요일 아침 설거지 하던 남편이 말한다.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나는 안으로 생각한다. '그러게 점점 더 물이 안 내려가네...'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는 날이라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싱크대 걱정은 고이 접어 둔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밖에서 점심까지 먹고 들어오니 오후 3시를 넘긴 시간이다. 뜨거운 물을 받아 유칼립투스 오일 몇 방울을 떨어 뜨린 욕조로 코가 꽉 막혀 버린 채 감기를 앓고 있는 두 아이를 들여보냈다. 그런 뒤에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싱크대 앞에 섰다.



작년이었다. 싱크대 하부장을 열 때마다 하수구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몇 가지 검색 끝에 배수구 냄새가 올라오지 않도록 냄새 차단 장치가 붙어 있는 제품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정확하게는 남편이 시간 내어 갈아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가 직접 할 수 있을까 골몰하며, 셀프 교체하는 방법이 담긴 영상까지 꼼꼼히 시청했다.



며칠 뒤 주문한 제품이 도착했다. 1시간 정도 걸렸지만 냄새 차단 장치가 달린 싱크대 배수구 전체를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 잘못하면 물이 샐 수도 있는데 무사히 설치되었다. 그날부터는 싱크대 하부장을 열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냄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물이 잘 빠지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교체한 제품은 싱크대 배수구와 하수구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가운데 연결된 냄새 차단 장치를 거쳐야 물이 빠지는 구조다. 물 빠짐이 이전보다 조금 더디긴 했다. 그렇지만 물을 많이 썼다고 매번 싱크대 안이 물바다로 변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탈이 난 것이다. 과탄산 소다와 뜨거운 물을 부어 보아도 소용이 없길 몇 차례. 1년에 한두 번 설거지를 할까 말까 한 남편도 이상함을 감지한 것을 보고서 손을 걷어 부치게 되었다. 아이들이 욕조에서 몸을 담그고 씻고 나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그 30분 안에 해결을 봐야 한다. 아이들이 나오면 엄마 곁에서 일일이 훈수를 두기 때문에 집중하기 어렵다.



싱크대 배수구 분해 작전에 돌입했다. 배수구 바로 아래 물이 샐 것을 대비해 통 하나를 받쳐 두었다. 싱크대 배수구와 냄새 차단 장치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을 힘주어 돌렸다. 다행히 쉽게 분리되었다. 안을 들여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쌓인 찌꺼기가 뭉쳐져 막혀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먼저 비우고 설거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거름망을 빠져나간 작은 찌꺼기들이 모인 모양이다. 배관 전체를 꽉 막았다면 물이 아예 내려가지 않았겠지만 가운데를 기점으로 테두리 부분에만 분포되어 있었다. 물이 내려가야 하는 구멍이 좁아졌기에 한꺼번에 물을 많이 썼을 때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빼낸 뒤 안방 화장실로 들고 가서, 칫솔을 이용해 안쪽까지 깨끗하게 세척했다. 처음과 같은 상태로 조립을 한 뒤 혹시 몰라 사이에 휴지를 끼워 두었다. 물이 샌다면 바로 휴지가 젖을 것이다. 싱크대 수도를 틀어 통에 물을 가득 담았다. 한꺼번에 싱크대로 부었다. 잠시 긴장. 배고플 때 배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소리처럼 꼬르륵 소리를 내며 물이 시원하게 내려간다. 잡혔던 미간의 주름도 스르르 풀린다. 멀쩡하게 마른 상태인 휴지를 확인하고, 마무리 청소까지 마쳤다.



"엄마 우리 이제 나가?" 욕조에서 실컷 물놀이를 했는지 작은 아이가 묻는다. 암. 이제 나와도 된다. 싱크대 배수구와의 한판승도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니. 나도 모르게 큭큭 소리를 내며 웃는다. 시원스레 빠지는 물을 바라보며 저녁 설거지를 할 때까지 내내 흐뭇했다. 이게 무어라고 시간을 끌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한편 스물둘의 나는 잠에서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 미닫이 문 하나로 구분된 주방 쪽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감지되었다. 스물둘에 나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세 번째 자취방이었던 그곳은 2층 첫 번째 집이면서 101호였다. 주소를 2층 101호라고 쓰면, 우체국이나 택배 아저씨의 확인 전화를 받곤 했다.



그날 아침 2층 101호 주방에서는 심상찮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그 집의 주인이자 스물둘의 나는 살금살금 그곳으로 향했다. 주방 바닥을 보다 뒤로 물러선다. 싱크대를 중심으로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냄새까지 맡아지진 않았지만 멀리서 보아도 그리 맑은 물은 아닌 것 같았다. 인상을 한껏 구긴 채로 잠시 멈춰 있다가 이런저런 것들을 동원하여 물을 닦았다. 그다음은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이사 나올 때까지 싱크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흔 하나의 나는 싱크대 배구수를 분해해 청소할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다. 그러나 스물둘의 나는 싱크대 배수구가 어디 달렸는지 알지도 못했다. 월세 세입자 집에 생긴 문제는 집주인이 해결해 줘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몰랐다. 스물둘, 직장 생활 4년 차, 로션 하나만 발라도 탱탱했던 피부와 새벽까지 술 마시다 출근해도 끄떡없는 체력을 가졌지만,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생활 속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슬기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필러 시술을 추천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피부와 전날 밤 12시만 넘겨도 다음 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도 힘들어지는 마흔 하나다. 거울 속의 내가 스물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무릇 마흔 하나인 지금 이대로가 더 좋다고 느낀다.



스물둘의 나는 지난 19년 동안 쌓인 무수한 도전과 실패로 인해 쑥쑥 자라나 한 사람을 지탱해 주고 있는 단단한 뿌리를 가지지는 못했다. 어떤 뿌리는 자라다 말아서 짧기도 하고, 어떤 뿌리는 굵기보단 실처럼 가늘고 자잘한 것들이 잔뜩 붙어 있기도 한 모습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 되었을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주어 살기를 희망한다. 그것들을 나는 용기라 부른다.



지난 시간이 나에게 준 것은 적재적소에 맞게 꺼내 쓸 수 있는 똘똘함과 슬기로움도 있다. 그렇지만 그중 제일은 용기다. 그 용기가 소소하게는 싱크대 배수구를 분해하게 돕는다. 벌어지는 모든 과정과 결과를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마음과 그래야만 한다는 사명감 또한 마흔 하나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용기를 가진 내가 되어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과거로 돌아가 얼마든지 자신의 흑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과거 여행 능력자가 있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은 별안간 과거로의 여행을 그만둬 버린다. 남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돌아가 후회되는 선택도 바꿔버릴 수 있을 텐데. 그는 왜 그런 기회를 포기해 버린 것일까? 지금이 충분히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매일을 충분히 잘 살아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마흔 하나가 된 나는, 그 영화가 진짜로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를 의미 하나를 발견해 낸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빤한 과거의 일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는 지금을 나답게 살아내는 것이, 내 인생을 잘 살아내는 길이라는 걸 말이다.



참으로 어리숙하고 답답한 모습이 아닐 수 없지만, 매일을 치열하게 살았던 스물둘의 나도 그렇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할 수 없다. 평균대 위에 올라선 듯 아슬아슬 버텨왔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도 나를 지탱해 내는 뿌리가 되었다. 매일을 나답게 잘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참 의미라는 걸 마침내 깨달고야 만, 마흔 하나가 된 나를 대견해 할 수 있는 것도 스물둘의 내가 잘 살아줬기 때문이니까. 코 끝이 살짝 찡해진다.



"와 물 잘 내려간다~ 엄마가 싱크대 배수구 뜯어서 청소했다니까? 대단하지?" 남자 셋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잘했다 한다. 작은 아이는 직접 와서 어디를 뜯었느냐고 참견도 하고, 큰 아이는 슬쩍 보고 "대단하네~"하고, 남편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조금 머쓱해했던 것 같다. 마흔 하나의 11월 어느 날을 잘 살아낸다. 오늘 살아냄은 또다시 나의 뿌리 중 하나가 되어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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