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소녀도 이겨냈는걸.
세상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곧이어 음소거 버튼을 해제한 것처럼,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엌문을 열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달렸다. 찬물을 틀어 미친 듯이 내 두 다리에 부었다. 방에서 뛰어나온 아빠 등에 업혀 응급실로 향했다. 오른쪽 다리 허벅지 안쪽부터 발등까지, 왼쪽 다리는 종아리에서부터 발등까지, 진단은 3도 화상이었다. 16살 소녀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 일의 발단은 미술 숙제에서 비롯되었다. 숙제가 갑자기 공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이 지나면 숙제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그날따라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여러 개의 과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양초 공예를 선택했다. 양초와 크레파스를 녹여 틀에 부어 완성하면 되는 거라 가장 쉬워 보였다.
하얀 양초와 크레파스 조각을 못 쓰는 냄비에 넣고 녹인 뒤, 동생이 잡고 있던 틀에 붓는 중이었다. 냄비에서 틀에 부을 때 타닥타닥 하면서 내용물이 튀었는데 그것에 놀라 틀을 놓쳤다. 그게 가장 먼저 내 발등에 떨어졌다. 놀라서 발등을 쳐다보려다 손에 들고 있던 냄비를 함께 기울였던 것이다. 냄비에 남았던 나머지 뜨거운 것들 까지도 전부 내 다리 위로 흘러내렸다.
화상을 입었을 당시 그 뜨거움도 고통이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매일 아침 받았던 화상 치료 과정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처치실로 들어간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 다리에 감아 두었던 붕대를 푼다. 붕대를 풀면 그 안에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집들이 여기저기에 가득하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 등장. 가위로 사정없이 그 물집들을 자른다. 거즈로 깨끗이 닦은 뒤에는 화상 연고를 듬뿍 바른다. 아마도 통증을 완화시키는 성분도 들어가 있었을 터. 일련의 과정만 놓고 생각해 보면 10분 이상 걸리지 않았을 것 같지만 고통을 잊기 위해 귀에 꽃아 두었던 카세트테이프 속 음악이 계속 다음 곡으로 오래도록 이어졌던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크게 성장하는 시기를 한 번쯤 겪는 것 같다. 나는 그때가 아니었을까?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는 입원 수속 때 한 번, 퇴원 수속 때 한 번 병원에 들렀다. 아빠는 응급실에서 본 게 전부였다. 두 살 터울 동생이 학교를 마치면 늘 나를 보러 왔지만, 치료 과정을 견디는 것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한 번은 침대에서 눈물이 나왔다. 내 울음소리가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지자, 같은 방을 쓰던 어른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면 너무 아파요. 그게 너무 무서워서 내려가지를 못하겠어요."
화상을 입은 두 다리를 침대에서 내리면 세상의 모든 중력이 나에게로 향해 내 살갗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갑자기 온도가 올라가는 전기장판이라도 두른 듯 온몸에 열이 나고 땅에 닿은 발바닥은 부들부들 떨렸다. 하루종일 맞고 있는 링거 탓에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어 졌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겁부터 났다.
화장실에 가려면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두 다리에 있는 모든 피부들이 뜯겨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을 또다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앉았다 일어설 때도 똑같이 느껴졌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큰 결심을 해야만 갈 수 있었던 화장실 가기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견딜 만 해졌다. 어느새 침대에서 다리를 내려도 아프지 않았다. 더 이상 화장실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아 졌다.
인생을 살다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때를 떠올린다. 내 다리에 생겼던 커다란 물집, 그 물집을 가르던 차디찼던 가위의 촉감과 화장실을 가고 싶어 질 때마다 두려웠던 그 마음까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정도는 그때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모든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사그라 들더라.' 하는 생각까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을 겪었던 경험이나 정말 억울하게 오해받았던 순간이라던지, 혹은 당황하거나 부끄러웠던 일들도. 그런 순간들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일 테다. 물론 그런 생각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날의 기억들은 교훈이 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어떤 경험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가 살면서 겪은 모든 경험의 파편 하나하나는 결국엔 내 인생 어딘가에서 퍼즐이 맞춰지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비껴갈 수 있다면 비껴가고 싶다. 운명이라는 말이 나에게만은 적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겪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지 않았을까? 결국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일 테다. 가난했고, 또 아팠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내 경험들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 나는, 아주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화상 치료가 끝나 학교에 갔다. 여전히 여름은 진행 중이었지만 붕대를 감은 위로 두꺼운 까만 스타킹을 신어야만 했다. 햇빛에 노출되면 상처 부위가 검게 변하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이 더욱 더웠던 기억. 버스만 타면 내 다리를 가리키며 수군대던 또래들의 시선을 견디느라 더 땀이 났다. 그땐 몰랐다. 그 경험이 나라는 사람을 얼마나 조심성 있고 끈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게 될지 말이다.
16살 소녀일 때도 참고 견딜 줄 아는 아이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고 싶다. 힘들게 이겨냈던 것들은 결국은 이렇게 돌고 돌아 다시 나 자신에게 희망을 준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지금도 내 두 다리에 남아 있는 흉터 자국이 밉지 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