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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Oct 04. 2024

젖은 머리로 달려라 하니처럼 달렸다

나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에 대해 

바닷가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곳에서 학교를 나왔고, 첫 직장을 다녔다. 여름이 되면 유독 바닷물에 젖은 휴대폰 수리가 많이 접수되었다. 휴대폰을 맡기는 사람들 중에는 휴대폰은 망가져도 괜찮은데 안에 있는 사진들을 꼭 좀 살려 달라고 했다. 전원이 들어오고, 충전잭만 살릴 수 있다면 컴퓨터와 연결하여 휴대폰 속 사진을 살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소금물에 담겨 절여진 배추처럼 잔뜩 숨이 죽은 휴대폰을 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소금기를 깨끗하게 세척하고, 세척제로 2차 세척을 한 뒤 침수된 휴대폰을 말리는 기계 안에 집어넣는다. 다시 꺼내어 부식된 부속에 납땜을 하거나 다시 세척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바싹 말리기 전에 섣불리 전원을 켜 버리면 안에 있던 데이터가 모두 날아가 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원을 켜 보는 순간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반나절 가까운 시간 동안 꼬박 말리고 세척하고를 반복한 휴대폰의 전원을 켜보는 순간이 가장 떨리는 순간이다. 휴대폰을 모두 조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액정과 메인보드만 연결한 뒤 핀셋으로 전원버튼을 살짝 터치하는 순간, 내 주먹만 하다는 심장이 콩알처럼 줄어든 것만 같다. 휴대폰 숫자 기판 쪽 lcd가 켜지면 1차 통과, 화면이 로딩되면서 바탕화면이 나오기 전까지 불이 다시 깜빡깜빡거린다면 2차 통과, 시계가 뜨는 배경화면이 나올 때까지 숨죽이고 다시 지켜본다. 살.렸.다. 




바닷물에 들어갔던 휴대폰은 전원이 켜지는 것조차 힘든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전원이 정상적으로 켜진다고 하더라도 통화라든가 카메라 기능이라든가 기타 기능들이 제동작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추후에 잔고장도 많다. 그래서 비용이 많이 드는 수리는 권하지 않는다.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가 금방 재고장 나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대폰 수리 과정은 액정이 깨졌다거나 버튼이 잘 눌리지 않는 등의 고장 수리보다 훨씬 시간도 오래 걸리며, 고생스럽다. 




수리 후 고객들의 만족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살려 보려고 애썼던 이유는 그들의 '추억'을 살려 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를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지만, 휴대폰 카메라로 일상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아지는 때였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찍어둔 사진들이 다 들어 있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도저히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많은 노력 끝에도 살리지 못한 경우에는 내 잘못도 아닌데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안타까운 말과 함께 나는 이런 말을 전하곤 했다. "휴대폰 작동은 안 되지만 바로 버리지 마세요. 전원도 켜지 마시고요. 3-4일 정도 그냥 그늘에 놔두고 잊고 지내다가, 한 번 전원을 켜 보세요. 바닷물이 제거되었고, 깨끗하게 세척되어 건조된 상태이기 때문에 간혹 가다 전원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답니다." 이처럼 기계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비스 업종에서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전화벨이 두려워진다. 여러 대의 전화가 하나의 번호로 묶여있고, 내선번호로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그럴 때면 나에게 걸려온 전화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된다. 하지만 "수경 씨 전화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상대방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입술이 바짝 마른다. '클레임이면 어쩌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수리하고 간 사람인데요..." 

"네 고객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접수 화면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하니 지난주에 바닷물 침수로 수리 불가를 받고 돌아간 고객분이셨다. 짧은 순간에 온갖 걱정과 추측이 머릿속을 스친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다. 

"아~네 ooo고객님 안녕하세요?"

"네 기사님, 그때 휴대폰 며칠 뒀다가 한 번 켜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켜 봤는데 다행히 켜지더라고요. 벨소리가 안 들리긴 하는데, 사진은 다 찾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간혹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전화하셔서 수리 잘해줘서,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지나가다 들렀다면서 뛰어다니며 일하고 있다가 얼굴을 알아보고(그땐 참 기억력이 남달랐지) 인사를 하는 내 손에 비타 500이며 빵 봉지며 건네주고는 혹여나 내가 따라올까 봐 막 도망가시는 귀여운 분들도 계셨다. 내가 출근도 하기 전부터 센터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고객님도 계셨고, 내가 휴가이면 다음에 오겠다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 따듯한 마음들 하나하나가 고단했던 스무 살짜리 어린 나를 키운 것이다. 





그날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휴대폰 수리를 하느라 저녁도 거른 상태였다. 오후부터 밀려 들어온 수리 건들은 다음날 오전 수리로 미뤄졌다. 당연히 나는 야근 확정이었다. 시계를 보니 도저히 수리를 다 마치고서는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번도 출석하지 못했다. "선배님 언제까지 계실 거예요? 그럼 저 학교 좀 갔다 올게요~" 책상을 빠르게 정리한 뒤 탈의실로 달려가 가방만 달랑 들고뛰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아 근무복 그대로 달렸다. 버스 시간 5분 전, 말만 가을이지 여전히 습하고 덥다. 땀을 흘리며 엉망인 얼굴로 간신히 버스에 올랐다. 




출처: 일구장창 블로그




1년 동안 기술을 배웠고 3개월 동안 다시 수습 기간을 거치면서 실무를 익혔다. 그렇지만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들은 전공이 전자나 통신 쪽인 분들도 많았고, 물론 경력도 상당했다. 쩔쩔매는 내가 도저히 안되어 물어보면 5분도 안되어 해결책을 내놓으시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매번 이렇게 물어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야겠다 생각했을 때 야간 대학교 정보 통신과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가 하는 일을 잘하고 싶고, 나를 믿고 맡겨 주시는 분들께 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달려라 하니처럼 늘 달렸던 시절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10kg이 절로 빠졌으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 가기 싫다~~~"를 외치다가 머리를 감고서야 비로소 정신 차린 뒤, 젖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 뜨리며 출근길에 올랐던 그때,  왜 나는 그때가 가장 나답고 찬란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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