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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May 24. 2024

나는 내가 타고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사주팔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수학과 영어 과목에 대해서 수준별 학습을 시행했다. 수학과 영어 수업 시간이 되면 A, B, C등급에 따라 각기 다른 반으로 이동해 수업을 받게 되었다. 수학이야 수포자였으니 B반이라도 된 것이 만족스러웠는데 영어가 C라는 건 상당히 거슬리는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C반 영어 선생님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수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선생님에 대한 감정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었는지는 잊어버렸는데 선생님께 무언가를 허락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생님께 허락을 구하고자 선생님께 다가가 "선생님 00 하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00 하면 '안'될까요?라고 물으면 네가 원하는 게 '안' 되는 게 되는 거고, 그렇다면 나도 '안'되는 거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봐"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장난이신가 싶고, 그냥 허락해 주시면 되는 걸 가지고 괜히 핀잔을 주신다는 서운함이 컸다. 그런데 수업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어느 순간 그 말을 떠올리는데 왜인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자신 없고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지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 나는 굉장히 발랄한 소녀였다. 동네 여기저기를 누비며 언니 동생 할 것 없이 친하게 지냈고 매일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오죽하면 2살 아래인 내 동생은 아침에 내가 자길 두고 놀러 가버릴까 봐 신발도 먼저 신고 기다렸다. 나는 그런 동생이 귀찮아서 맨날 도망 다녔지만 동생은 내가 어디에 숨어 있어도 "언니~언니" 하면서 다 찾아냈다. 뽕도 따 먹으러 다니고, 친구 집 옥상에 가서 비석 치기도 하고, 온 동네를 누비며 술래 잡기, 숨바꼭질을 했다. 이 집 저 집 가서 변죽 좋게 밥도 잘 얻어먹었다.




그랬던 내가 시들시들해진 것은 6학년 때부터였다. 친했던 친구들이 모두 합창단에 들어간다기에 덩달아 따라 들어갔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불었고 잘한다고 용돈도 두둑하게 받았던 나였기에 합창단 활동은 정말 재미있었다.




가을이 되어 가던 무렵 학교에서 학예회가 열리게 되었다. 우리 합창단 실력은 꽤 좋은 편이어서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강당에 모여 연습을 하다가 커튼 뒤쪽에 모였다. 허리 사이즈를 재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합창단복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뭐가 뭔지 잘 몰랐던 나는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사이즈를 쟀다. 그러곤 얼마 뒤 받은 봉투 안에는 합창단복 가격이 적힌 종이와 함께 동의서가 들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7만 원정도 되는 금액이었던 것 같다. 합창단복을 맞추면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말했지만 엄마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꼭 함께 하고 싶어서 몰래 신청한다고 써서 내버렸다.  옷이 나오면 엄마도 어쩔 수 없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무나 간절하게 그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엄마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벌쩍 뛰었다. 자신과는 상의도 없이 옷을 맞췄고, 돈을 달라니 말도 안 된다면서 절대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반응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힘들어서 매일 밤 울며 잠이 들었다. 학교에도 너무 가기 싫었다. 합창단 원복비를 미납했다고 찾아오는 합창부 선생님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여러 번 사정해 보았지만 소용없었고 끝끝내 수납하지 못했다. 학예회 날은 다가왔다.




비록 합창단원복의 비용을 수납하진 못했지만 매몰차게 아이 하나를 내칠 수 없었던 것인지 나는 무사히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이 찾아와 꽃다발도 주고 사진도 찍었지만,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학예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합창단원복을 벗어 서랍 깊숙하게 집어넣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너무나 소중하고 좋았던 옷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아무리 부탁하고 애원해도 값을 치러주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떠나지 않아서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그날 그 서랍장 안에 깊숙하게 박힌 합창단 단원복처럼 밝고 명랑했던 내 어린 시절도 함께 봉인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쉽게 주눅 들고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갔다. 친구들 앞에선 아닌 척하고 밝은 척했지만 속으론 내내 그랬다. 혹시나 미움받을까 봐 말도 잘하지 지 못했고 특히 어른들에게 그랬다. 그런 상태로 진학했던 중학교에서 3년 내내 떠오르는 좋았던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니 그 생각만 하면 스스로가 참 가엽다.




그렇게 주눅 들고 눈치 보는 나를 C반 영어 선생님은 일찌감치 알아보셨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다시 찾아가 긍정문으로 묻는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된다고 생각하면 될 수 있어." 그런 일이 있고 얼마뒤 치러졌던 영어 시험에서 점수를 꽤 잘 받았고, B반으로 승격할 수 있었다.




지금 부모님께서 들으시면 서운해하실지는 모르지만 어릴 적 보았던 부모님과 우리 집은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부모에게 공감받고 사랑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주팔자로 바꿔 말하자면 부모 복은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살면서 삶을 포기하고 싶거나 더 이상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나에겐 C반 영어 선생님처럼 귀인이 되어 다가와준 분들이 계셨다.




중학교 1학년때 수경이는 노래 잘한다고, 글도 참 잘 쓴다고 늘 응원해 주셨던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 선생님은 어릴 때 자신도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고 하시면서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늘 말씀하셨다. 수업료를 늦게 낸 아이들 마음이 다칠까 봐 꼭 밖으로 불러서 따로 말씀해 주시던 분이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진로 상담 전담이셨다. 전교생 중에서 유일하게 취업을 하겠다고 말하던 날,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았다고 하시면서 가 보라고 해 주셔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 수 있었다. 제주도 수학여행 비용을 도저히 엄마에게 말할 수 없어 안 가겠다고 했을 때 수학여행 1주일 전에 내 수학여행비를 내주셨던 학부모님도 계셨다.




혼자 인생 끙끙 앓으며 살아왔다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귀인을 참 많이 만났구나 싶다.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선 정말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선 다는 말이 맞는구나 싶기도 하다. 아! 어릴 적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보살님도 계시다.




어느 날 집에 제사상 같은 게 차려졌다. 절대 애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방에 동생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심부름을 끝내고 나오는데 보살님 목소리가 들렸다.




"큰애는 참 타고난 복이 없어. 외로울 거야. 근데 걘 포기 안 해. 죽겠다 싶다가도 지가 돌파구 찾아서 나오는 애야" 하셨다. 살면서 미처 글로 적지 못할 정도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집안 형편과 엄마에게 받는 미움을 견디기 힘들어서 집에 들어오는 버스가 사고 났으면 하고 바라었던 날도 있었다. 버스에 탄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싶어 버스 사고를 더 이상 빌지 못했던 어느 날에는 버스에 있던 검은색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뒤집어쓰고 꼭 묶고 있으면 숨을 못 쉬겠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검은색 비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지만 끝내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살살 달래 한 걸음씩 옮겨 집으로 걸어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 보살님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 맞아. 지금 너무 힘들지만 분명 나는 이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아마도 그 보살님은 내가 힘든 걸 알고 계셨으려나? 그래서 일부러 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고 내가 미처 방을 빠져나가지 못한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주셨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분도 귀인일터.




언젠가 책을 읽는데 그런 문구를 보게 되었다. 사주팔자는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문구였다. 초년 복이 없는 사람은 중년 이후에 풀리고, 부모 복이 없는 사람은 남편 복에 자식 복은 좋을 수 있으며 그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귀인 복이 있다고. 어릴 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귀담아듣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 말이 참 위안이 된다. 그리고 돌아보니 맞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사주팔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믿어 보기로 한다. 지금 피우지 못했다고 꽃이 영영 맺히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다를 거라는 뻔한 말 정말 믿기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을 때도 가끔 있었다.




중요한 건 내가 맞서는 것이다. 지지리 복이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니라 타고난 복이 이기는지 아니면 내 근성이 이기는지. 노력한 것이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운명에 맞설 가치는 분명히 있다. 적어도 이렇게 글을 쓸 수는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내 글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귀인이 된 것만 같아서 가슴이 따스해진다.




지금부터는 나도 내 인생의 귀인이 되려 한다. 돈 많은 갑부 먼 친척이 어릴 때 잠깐 봤던 나를 귀하게 여겨, 어마어마한 돈을 상속해 주는 일을 기다리던 어린아이는 이제 보내 주려고 한다.




이 순간, 내가 겪었던 과거보다 더 극한 상황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황과 심정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당신 인생의 행복은 지금부터라고. 나 스스로 사주팔자 원하는 대로 다시 써 내려가자고. 나는 그저 나 그 자체일 뿐이니 가족이나 상황에 매몰되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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