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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May 10. 2024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

할머니집 부엌 옆에는 엉성하게 지어 덧붙인 삼촌 방이 있었다. 밖에서 보면 평평해 보이는데 문을 열고 들어 서면 발이 쑥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유난히 작았던 문과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발이 쑥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삼촌 방은 이상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싶다.




7살 소녀 엘리스에게 이상한 나라는 모험 가득한 환상의 세계였듯 나의 7살 소녀 시절에 삼촌 방도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환상 세계였다.




할머니 집에 손님이 오면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 눈길을 받고 있노라면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삼촌방에 숨었다. 그곳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기도 했고, 혼자 놀다 잠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많은 기억들이 흐릿해졌지만, 내 손에 사진이 들려 있던 날은 왠지 잊히지가 않는다. 그날도 집에 온 친척들을 피해 삼촌 방으로 갔다. 삼촌 방에 숨겨 두었던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사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참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사진 속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빨간색 엑스를 그어 버렸다. 그리고  ‘날 버린 여자’라고 적었다. 그러곤 잠이 들었는데 깨어났을 땐 손에 쥐고 있었던 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아마도 할머니가 치웠을 것이다.




그즈음 우리 부모님은 헤어졌다. 7살이면 말귀를 알아 들었을 텐데 부모님이 헤어지는 이유를 듣지 못했고, 무엇보다 친엄마와 작별 인사를 나눈 기억이 없다. 그저 꿈속에서 아빠 손을 잡고서 멀어져 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는데 그게 친엄마의 뒷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둘의 헤어진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른들은 모이면 친엄마에 대해 안 좋은 소리들을 했다. 내가 듣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그땐 어른들 말만 믿었다. 그래서 그저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미워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의 바람대로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삭제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년쯤 후 아빠는 재혼을 했고, 나에겐 엄마가 다시 생겼다. 그 일에 대해서도 어른들은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어른들의 결정에 우리는 새 가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부모님의 사정 때문이었는지 나의 고집 때문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재혼하고서도 나는 할머니와 1년을 넘게 지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친엄마도 모자라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빠와 또 다른 엄마까지도 많이 미워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때부터 함께 하게 된 새로운 가정에서 한 동안은 평온했었다.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전학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집안 형편이 나날이 좋아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매일 싸웠고, 학교에 내야 하는 급식비는 날마다 밀렸기 때문이다. 나날이 기우는 집안 형편과 싸움 소리와 물건 부서지는 소리,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사건들과 함께 어찌어찌 세월은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고, 엄마가 되기를 앞두고 있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지독하게 심했다. 입덧이 너무 심해 물도 잘 마시지 못했던 상태였고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 혼자서 병원을 찾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내 눈엔 친정엄마와 함께 온 임산부들만 보였다.




어떤 모녀가 내 옆에 앉아서 "엄마도 너 가졌을 때 그렇게 딸기가 먹고 싶었는데 너도 그러니?"라고 물으며 웃는데 가슴이 아려왔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라서 그런지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피할 사이 없이 파도처럼 철썩철썩 밀려와서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나를 가졌을 때 어땠는지 물을 혈육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매여왔다.





그 뒤로도 밤마다 베개를 적시며 울곤 했다. 나를 내버려 두고 떠났던 엄마에 대한 원망, 아이 셋이나 데리고 새 가정을 꾸려 놓고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실망감에 몸부림치며 수많은 밤을 울음으로 보냈다. 아이를 낳고서 키우면서도 수시로 그런 감정이 올라오곤 했다.





큰 아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유난히 걱정도 많고 예민하다. 어릴 때는 밤잠을 길게 못 자는 편이었다. 밤 12시만 되면 2시간 간격으로 깨서 우는데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며칠 지내다 피곤함에 이성을 잃은 나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기저귀 찬 아이 엉덩이를 매몰차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이 얼굴은 온통 빨갛고 눈물범벅이었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 머리맡에서 "엄마가 부족해서 미안해. 아가.. 정말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채 식지 못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다 못난 부모들 때문이야 정상적인 집안에서 평범하게 자랐다면 이렇게 아이에게 화내고 사과하는 못난 엄마가 되진 않았을 거야'라고 씩씩댔다.




부끄럽게도 이런 생각이 책임전가에 불가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건 다섯 살 터울의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부터였다. 오랜 시간 부모를 탓했던 게 나와 아이의 인생에 좋을 리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혼과 재혼,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급격히 변했던 가정환경과 새로운 가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던 부모님의 다툼, 그리고 가난. 그 속에서 자란 내가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나의 속 사정을 전부 꿰뚫을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부모들의 속 사정을 전부 알 수는 없다. 제멋대로 오해하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 속에서 내 상처는 어쩜 실제보다 왜곡되게 곪아버렸을 가능성도 크다. 무엇보다 원부모에 대한 원망을 계속해서 키운다면 나의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려울 거라는 걸 깨달았다.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일 뿐이다. 부모와 분리되어 가정을 꾸린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부모를 끌어들여 인생이 안 좋은 식으로 풀릴 때마다 비난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부모 잘못 만나서 내가 이렇게 일이 안 풀리지'라고 해 버리면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내린 선택들이었으니 책임도 나에게 있는데, 부모에게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부모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었다.




부모가 되어 보니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알 것 같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에게 100% 옳은 것만 줄 수 없다는 걸 지금은 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인 사람은 없다. 부모 또한 실수하고 반성하며 배우면서 성장하는 존재다. 우리 부모 또한 자신들의 최선을 다했다고 믿어 보기로 했다.




지금도 우리 부모님은 다투신다. 어떨 땐 큰 딸인 너한테 밖에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면서 한 시간이 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날엔 현실의 나까지 예민해져서 남편과 다투기도 했었다. 속 편히 자란 것만 같은 남편에게 괜히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부모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가듯이 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나의 감정과 시간을 쏟지 않기로 한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부모에게서 독립하련다. 용서는 아니지만 원망과 미움은 과거에 두고 왔다. 지금부터는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그저 응원하고 싶다. 더 이상 부모의 일이 내 인생을 흔들지 못하도록 단단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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