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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구름 Feb 22. 2021

엄마와 아이, 따로 또 같이


그저 흐린 날인 줄만 알았다. 문을 나서면서 마주하게 된  세상은 티 없이 맑은 날이었다. 초저녁, 유난히 빛나던 그날의 도시 풍경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눈이 나빴지만 집에서 믿어 주질 않아 1년 뒤에나 찾은 안경점에서 당장 안경을 쓰지 않으면 큰일 날 정도로 떨어진 시력에 대해서 들었다. 그 자리에서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끼고 나서 바라본 안경점 안은 아까보다 더 눈부셨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안경을 맞추고 안경점 문을 나서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이 이렇게나 밝고 예뻤다니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엉뚱한 데 돈이 나가서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 엄마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더랬다.




며칠 전부터 티비 자막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아이의 말에도 설마 안경 쓸 정도로 나빠졌겠어?라고 생각했다. 시력 검사는 한 번 해야지 했으니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처럼 나선 길이었는데, 집에 돌아왔을 땐 전에 없던 동그란 안경과 함께였다.




가기 전까지 내내 조금 두렵고 걱정된다며 울상이었던 큰 아이를 보며 나를 닮아 예민하고 걱정 많은 성격이 좀 성가시다는 생각도 했다.




집에 돌아와 불편해 끼지 않을 줄 알았던 안경을 쓰고, 위로 올려 맨눈으로 한 번, 안경 쓴 눈으로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살피면서 살며시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았다. 순간, 마음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듯 올라왔다.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무심하고 무던한 엄마가 되지는 말아야지, 아이들의 변화에 민감하고 공감해 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했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오만했었다.




아이들 보다 내 시간표에 급급해 살며 이런저런 신호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나, 아이들을 걸림돌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다.













나를 믿고 이 세상에
떳떳하게 살 붙여 나온 아이를 곁에 두었는데
나 혼자일 때만큼 자유롭다면 그게 잘못된 일.
육아는 노동이 아니라 나의 삶
내게 찾아온 새로운 계절이었다.

-깊은 밤 엄마를 만났다 중에서-






얼마 전 읽었던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그어진 밑줄들 사이에서 유달리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던 문구들.




어쩌면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아이들 나이에 맞게 달리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니냐며 아이들과 맞추던 발걸음을 달리하고, 나만의 계절을 살고 싶었던 거였구나 뜨끔하고 말았다. 10살이면, 이제 스스로 걸어가야지, 엄마가 언제까지 챙겨주니? 동생은 아직 아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이해해 줄 수는 없겠니?




내 이기심과 욕심에 가려진 큰아이의 외로움과 고민들을 모두 모른척하고 엄마를 이해해 달라고 강요했던 건 아닐지, 갑자기 눈이 나빠져 안경을 쓰면서도 엄마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는 아이 앞에서, 내 시간만을 아까워하며 주워 담던 어리석은 내 모습이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나로서 사는 삶


아이의 엄마로 사는 삶


이 모든 것이 내가 맞게 입어야 하는 다른 듯 같을 수밖에 없는 일상임을 또 한 번 깨우친다. 퇴고 전의 글은 모두 형편없듯이 내 육아는 퇴고를 논하기에도 아직 너무나 이르다.




나와 아이가 서로 교집합 되는 언저리를 잘 빚어 나가며 나 또한 그 속에서 충분히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육아의 시간은 아깝게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깊은 땅속의 나무뿌리처럼 넓게 퍼져 나가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뿌리가 더 복잡하고 멀리 퍼져 나갈수록 나무는 속이 꽉 찬 알토란이 될 것이다.




같이 자라자. 아이와 함께 성장하자.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서로의 마음의 교집합이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도록,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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