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전성시대에 발맞춰 발신 번호 표시 서비스가 시행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에는 유료 부가서비스로 선택이 가능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도 모두 사용하지만.
필요한 전화를 받지 못했을 때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걸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받기 싫은 전화를 피하는 용도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발신번호에 표시되는 이름만 보아도 가슴을 벌렁 거리게 만드는 두 사람이 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생각하면서 짧은 시간 온갖 생각이 오간다. 정말 드물지만 별 일 아닌데 전화를 한 거였다면, '정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하고 종교도 없는 내가 절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그냥 잠깐 지나가는 인생의 풍파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던 사건은 20년 전부터 현재까지 끊이질 않고 발생하고 있다. 보통은 자식이 속 썩인다고 하던데, 우리 집은 정반대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 대한 책임 중 상당 부분이 그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뒷감당은 우리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실망하고 돌아서고를 반복했지만, 나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잃게 만들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완전히 끊어낼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으로 시작하는 생략된 수많은 말들을 계속해서 삼키고 삼켰다.
엄마가 되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화를 내지 않는 항상 다정한 엄마도, 아이들 공부에 적극적인 엄마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하는 엄마도 나는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걱정시키는 엄마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엄마지만 '나'로 살면서 아이들과의 자립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할지라도 남편과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엄마대로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여러모로 온전한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른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 사건을 만들고 싶지도 않지만, 그 뒷수습을 아이들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다. 발신번호만 봐도 가슴이 벌렁댈 정도의 감정을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무결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노력이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나를 그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다그쳐왔다. 끊임없이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을 산다. 애석하게도 나는 오늘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그동안은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왔다. 지금 누리는 행복에 안주하면 안 된다고, 오히려 아무 걱정이 없을 때 더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정말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꼭 자립의 준비를 오늘의 희생으로 준비해야 하는 걸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나의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거기에서부터 온전히 독립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부모처럼 되지 않기 위해'라는 전제 조건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독립을 못하고 있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걸.
독립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부모나 자식에게 일어나는 고통을 (원인이 비록 그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모른 척한다는 뜻은 아닐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분리시켜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남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 것일까?
그들에게서 출발한다면 문제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나에서 출발한다면 어떨까? 내가 정말 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나라는 사람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고, 어떤 모습이 되어야 만족할 수 있을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발신번호만 봐도 가슴이 벌렁 거리지 않는 단단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