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Jun 12. 2020

박아나의 북토크

중2와 어린 왕자

 “어른들은 왜 다리를 꼬고 앉아요?” 내가 친한 유일한 중2가 내게 묻는다. “그러게, 이렇게 앉으면 자세가 틀어지는데, 자꾸 그러네.” 그러면서도 나는 꼰다리를 풀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게임하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게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아이와 내가 뭐가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약간 부끄러웠다. 사실 부끄러웠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날 나는 친한 중2에게 엄마 말 좀 잘 들어라, 친구도 좀 가려 사귀어라, 게임 시간 줄여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엄마표를 좀 순화한 이모표 잔소리랄까. 아이가 없으니 뭔가 좀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이도 납득할 만한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를 멋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직 아나운서였는데,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슨 말이라도 하겠지 싶었다.


  그 무섭다는 중2라 해도 오랜만에 만난 이모가 보기에는 여전히 귀여운 아이였다. 원래도 호기심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변함없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모, 유튜브 주제가 뭐해요?” “이모, 구독자수가 몇이에요?” “이모, 뉴스에 나왔어요?” “그럼 이모, 방송엔 언제 나와요?” 오랜만에 쏟아지는 과한 관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사이 대화의 주도권은 그 애에게 넘어가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도 전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가 끊임없이 내게 질문을 하는 이유가 내가 뭔가를 말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심도 들었다. 일종의 선공인 셈인가? 권투 경기였다면 나는 3라운드에 수건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고 하니까 댓글 남겨도 되냐고,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하니까 바로 구독을 눌러주는 아이에게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다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틈새를 노려 역공을 펼칠 기회는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처럼 나는 꼰대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 우리 때는 이랬다고 라떼 이야기를 들이대며 내가 꼰대라는 것을 인증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라면 자식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보기 드문 쿨한 어른이고 싶은 나는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철들지 않은 어른, 어쩌면 철든 어린이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이 내 안에 있었던 걸까.


  다리를 꼬고 앉으면 왠지 더 꼰대인 것 같아 꼰다리를 풀고 정자세로 앉았다. 진짜 철든 어린이, 어린 왕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마침 어린이를 위한 필독서로 나온 버전으로 읽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순수하게 다가왔다. 책의 표지를 넘기고 추천의 글을 읽었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 어린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첫 문장부터 너무나 교육적인 이 문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어린이를 위한 필독서 버전이라 어쩔 수 없긴 한가 보다. 하긴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배울 수 있는 나이니까 적극적으로 책을 활용하긴 해야겠지.


 하지만 추천의 글은 그때는 맞으면서도 지금은 틀린 말이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요즘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 같은 어른이지 아닐까. 코로나 19 이후 수업을 비대면 방식으로 하면서 온라인으로 학생들과 만난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여러 명의 학생들과 서로 묻기도 하고, 대답도 하면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하다 보니 할만했다. 처음에 느꼈던 비대면 수업에 대한 거부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을 현장에서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학교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까 시간이라든지, 교통비 같은 비용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편의성이 있다.


 그렇다. 온라인 강의에 익숙해지고, 유튜브 편집에도 겁이 없어진 나는 코로나 19로 가속화된 언택트 세상에서 느리지만 적응해가고 있다. 중2 친구와도 어떻게 하면 구독자 수를 늘릴 수 있는지, 중학생들은 무슨 유튜브를 좋아하는지 유튜브 이야기를 한참을 했다. 내 주변의 엄마들도 아이들 온라인 수업을 지켜보면서 따라가고 있다고 하니까 후천적 온라인 세대인 우리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선천적 온라인 세대인 요즘 아이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해본다.


 우리가 이렇게 애쓰고는 있지만, 어린 왕자와 장미처럼 무언가를 길들이거나 길들여질 틈도 없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게다가 불명확한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어느 순간 예전의 방식들이 다 잊혀 사라져 버리는 날 올 것 같아 그것도 슬프기도 하다. 갈 길이 더 먼 어른도, 적응이 빠른 아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말했던 비밀은 바로 이건데... 간단한 일이야. 사람들은 마음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해 두려고 그 말을 따라 했습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중요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서 쏟은 시간인 거야.” “내 장미를 위해서 내가 쏟은 시간이야.”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해 두려고 그 말을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잊지 않도록 해.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어야 해. 넌 너의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단 말이야...” 여우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해 두려고 그 말을 따라 했습니다.


  아... 중2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올껄 그랬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 가끔씩 어린 왕자를 꺼내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능하면 낭독해서 제 유튜브에도 올려보고 싶다는 생각도요. 오랜만에 위로받네요.


 









 


이전 04화 박아나의 북토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