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의 세계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브이앱을 봤다. 연습생 시절부터 거의 10년을 가까이해 온 막내 멤버를 생각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단다. “처음 봤을 때 애기였는데, 이렇게 컸나. 이젠 근육도 단단한 어른이 됐구나.” 내게 아이가 있었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끼면서 아이를 바라보겠지. 이럴 때 뭉클하다는 말도 쓸 수 있겠지만, 뭉클은 감정이 좀 거한 것 같고, 몽글몽글이 역시 적당하다.
몽글몽글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누군가 나를 설득할 일이 있으면, 이 단어를 꺼내 쓰면 된다. 나는 당장에 설득당할 것이다. 원래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어 사전을 찾아본다. 몽글몽글하다는 단어의 뜻은 덩이진 물건이 말랑말랑하고 몹시 매끄럽다, 살이 올라 포동포동하다 라는 뜻이 있다. 의외로 마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뜻은 없다. 몽글을 찾아봤다. 슬픔이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 복받치어 가슴이 갑자기 꽉 차는 듯한 느낌이라고 감정을 표현한다. 슬프고 화날 때 쓰는 말인 것 같은데, 이 몽글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뉘앙스가 바뀐 걸까. 거기다 몽글몽글하다는 말이 가진 원래의 의미가 더해져 뭔가 더 사랑스럽고 보드라운 기운이다.
몽글몽글하다 하면 포도부터 떠오른다. 덩이진 물건이 말랑말랑하고 몹시 매끄러운 것의 대표는 포도니까 말이다. 우리 집에 이 몽글몽글한 포도알이 열리는 포도나무가 있다. 처음 포도나무를 살 때 제대로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포도가 열릴까 싶어 망설였다. 그럼에도 고민 끝에 포도나무 두 그루를 집으로 데려온 이유는 와이너리를 좋아한 우리 부부의 로망 때문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기역자로 꺾어진 모양도 뭔가 멋스러웠다. 포도가 열리지 않아도 존재감 있어 보일 것 같았다. 기특하게도 포도나무는 심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보란 듯이 송이송이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샤인 머스켓처럼 연한 연둣빛이었다. 그러다 점점 색이 짙어지면서 우리가 아는 그 보랏빛 포도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9월 중순에 이르러 단맛이 절정에 이른 포도를 수확하게 되었다. 별로 신경 쓴 것도 없다. 비료 조금 준 것뿐인데, 포도는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배불리 먹을 정도로 포도가 넉넉하게 열렸다.
그다음 해에도 포도는 알아서 공부 잘 하는 모범생처럼 잘 열렸고, 더 풍성해졌다. 포도가 단향을 풍기며 익어갈 무렵에 그 향을 맡고 달려드는 새들만 조심하면 별 문제는 없었다. 일일이 과일 싸는 봉투로 싸주면 새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과연 저 답답한 봉투 안에서 다 썩어 문드러지는 거 아냐 싶지만, 기특하게 별 탈 없이 잘 익는다. 그렇게 한참을 포도나무가 아니라 봉투 나무로 버티고 나면 포도를 맛볼 수 있다. 포도를 수확한 나도, 포도나무도 한 해의 목표를 이룬 셈이다. 추워지기 전에 가지를 과감히 잘 잘라내고 나면, 포도나무는 긴 겨울잠에 들어간다. 가끔은 죽었나 싶을 정도 말라비틀어져 있는 모습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봄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포도나무에 새순이 돋는다. 가지들은 점점 뻗어나가고 깻잎 모양의 잎들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포도가 열린다.
유난히 추웠던 재작년 겨울,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이 이어졌고, 추위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땅들은 얼어붙었고, 거기에 숨을 붙이고 있던 생명들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지독히 차가웠던 겨울이 끝나고 포도나무는 어떻게 됐을까. 두 그루의 포도나무 중에 하나는 살아남고, 하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한 그루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힘도, 잎들의 푸르름도 예전과 달랐다. 포도가 열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태양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포도나무에 작은 송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송이들은 예전보다 크기도 작았고 그 수도 많지 않았다. 매달려 있는 모양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힘든 시간, 죽을 만큼 어려운 시간을 버텨내고, 곁에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독하게 살아남았다. 그래도 뭐라도 하겠다고, 내 임무는 수행하겠다고 아등바등대는 포도를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아니 몽글한 건가.
포도 수확철이 왔고, 열려있는 포도 중의 반은 연두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바뀌지 못했다. 지난겨울에 살아남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터라 거기까지 갈 힘은 부족했던 모양이다. 제법 잘 익어 보이는 포도알을 골라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속살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맛을 보았다. 아주 달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달기만 했던 그 전의 포도들과 달리 뭔가 복잡한 맛이 섞여 있었다. 시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짜기도 한 것 같다. 힘겹게 살아남은 포도알에는 시련과 고통과 눈물이 녹아 있었다. 인생의 맛이 이런 오묘함이 감도는 포도의 맛일까.
다시 한 해가 지났다. 앞으로 두세 달 뒤면 올해의 포도와 만나게 된다. 지금은 연둣빛 포도알들이 열심히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올해의 포도 맛은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 별 탈 없이 밝은 포도의 세계와는 달리, 2020년 우리들의 세계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감정 속에 어두운 나날들이었다. 코로나 19로 우리의 일상은 지난 어느 겨울 포도에게 다가왔던 위기처럼 아슬아슬하다.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불안한 눈빛 속에 감춰진 예민한 감정들과 마스크 너머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언제 즘이면 괜찮아질까.
한참을 생각하다 멍하게 포도를 바라본다. 몽글몽글하게 잘 열렸다. 몽글몽글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