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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Oct 25. 2020

박아나의 일상뉴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ft. 뉴욕의 가을)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끝났다. 자연스레 같은 제목의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덩달아 화제였다. 물론 사강의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읽었기에 새로 읽었다기보다는 다시 꺼내어 읽었거나, 떠올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드라마가 종영을 하고 나니, 드라마의 제목은 물음표로 끝나고, 소설은 말줄임표로 끝나는 것도 괜히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드라마에 비해 답답한 결말로 끝나는 사강의 소설에는 말줄임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강렬하지만 불안한 사랑과 안정적이지만 외로운 사랑, 그 어느 편이 나은 것인가. 어렸을 때는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지?라고 생각했었는데, 폴의 나이가 되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 말줄임표는 뭐랄까,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뭐 이런 느낌이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무래도 드라마가 클래식 음악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브람스나 슈만, 클라라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플롯 때문에 세 사람(브람스, 슈만, 클라라)에 더 관심이 갈 테지만, 나는 프랑수와즈 사강이 궁금해졌다. 열아홉의 나이에 그냥 써본 작품이 전 세계를 매혹시켰던 천재 소녀의 책을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뭔가 구설수에 좀 올랐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그녀의 작품 목록을 보니,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그리고 에세이도 썼다.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읽어볼까. <봉주르 뉴욕>, 여행 에세이다. 뉴욕이라... 10년 전 뉴욕에서 살았던 내게 뉴욕은 특별한 도시다. 그 옛날 사강에게도 뉴욕은 특별한 곳이었을까. 어차피 당장은 못 가는데, 사강과 함께 뉴욕으로 시간 여행이라도 떠나보자.

사강의 딸을 말을 빌리면, 파리가 아니었다면 뉴욕은 어머니가 살 수도 있었을 유일한 도시였다고.

 “How do you do?” 뉴욕의 심장은, 흔히들 심장 발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열의 폭발이라 해야 할 폭발 직전에 버림받은 뉴욕 남자들의 심장보다 빨리 뛴다. 그 정열이란 뉴욕과, 쭉 뻗은 뉴욕의 길과, 넘쳐 나는 뉴욕의 술과, 뉴욕의 냄새와, 뉴욕의 박진감에서 오는 정열이다. 시간 무조건 아끼고 보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고지식하고 일상에 지쳐 있는 이들 미국인의 손목에서, 맥박은 너무 빨리 뛴다. 시간을 허비할 줄이라곤 모르고 아끼려고만 들다니, 얼마나 감미로운 정열인가!


 뉴욕의 길거리에는 시간에 쫓기듯 빠른 걸음의 뉴요커들로 가득하다. 별로 바쁜 일 없었던 나는 이 바쁜 맥박의 대열에서 낙오되면 세상에서도 낙오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뛰다시피 걸었던 기억들이 난다. 그녀가 뉴욕에 있었던 1950년대나 지금이나, 뉴욕은 아무튼 빨랐나 보다. 뉴욕의 길은, 특히 미드타운 같은 경우는 길을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냥 일직선인데, 그것도 뉴욕의 빠름에 일조한다. 50가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아래로 쭉 내려가다 딱 한 번 꺾으면 14가의 유니언 스퀘어가 나오고 거기서 또 곧장 내려가면 언제든 소호까지 순간이동도 가능하다. 그렇게 숨차게 걷다 보면 뉴욕의 냄새가 느껴진다. 길거리 자판에서 파는 1달러 핫도그 냄새 같기도 하고, 그 옆에서 같이 파는 땅콩 볶는 냄새 같기도 하고, 여러 인종들에게서 나는 체취들이 한데 섞여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강바람 냄새 같기도 하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냄새는 잊히지 않는다.


 사강이 말한 뉴욕의 박진감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게 뉴욕의 박진감은 밤마다, 물론 낮에도,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였다. 소방차나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는 정말이지 뉴욕의 상징이다. 밤에는 그 소리가 더 크고 가깝게 들렸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 기는 하지만,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면, 뉴욕이라는 도시가 마치 영화 세트장 같고, 영화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소방차 소리처럼 들렸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 불안감을 일으키는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서울로 돌아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밤들을 보내니 희한하게도 그 소리가 그리워졌다. 그 이후 뉴욕을 다시 가게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마치 내게 “ 웰컴 백”이라고 환영의 인사를 보내는 것 같았다. “우리 예전이랑 변한 거 없어, 지금도 똑같아....” 이렇게 고백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은 그랬다.


 마침내 도시에 어둠이 내리고 뉴욕에 불이 켜진다. 어느새 뉴욕은 전등 불빛을 터뜨리는 거대한 유리창으로 바뀐다. 사무실마다 하나둘씩 불빛이 꺼진다. 그리고 마천루는 무례한 광고판으로 만든 조롱이라는 왕관을 쓴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력한 감시병이 된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숱한 살인과 이리저리 나뒹구는 빈 술병들과 난무하는 폭행들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게 될, 이 밤 앞에 서 있는 초라한 감시병인 것이다... 뉴욕은 지난밤의 불면증 탓에 눈꺼풀이 무거워져 온다. 하지만 곧 밤 사이에 있었던 무질서라곤 모르는 멀쩡한 얼굴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다. 뉴욕, 거대한 뉴욕은 다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꼿꼿하게 서 있다.


 타임스 스퀘어에서는 밤이 오지 않는다. 현란한 광고판들과 쏟아지는 사람들, 관광객들이 많긴 하지만, 은 이 도시가 주는 화려함의 극대치를 누려본다. 화려한 뉴욕의 밤은 뉴요커들의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방인들의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그냥 뉴욕이라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환상, 그 자체이다. 그런 휘황찬란한 공허함 때문인지, 나는 타임스 스퀘어를 지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가장 뉴욕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뉴욕스럽지 않은 것 같은, 허상으로 만들어진 공간 같아서다. 분명 밤인데, 밤을 거부하는 몸부림들로 가득한 이곳의 인공적인 불빛은 도시의 어둠을 비정상적으로 무력하게 만든다. 어쩌면 사강도 타임스 스퀘어를 지나가면 이런 생각을 했을까.

 뉴욕의 밤은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도시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외로움도 넘쳐난다. 그 외로움을 달래주는 수많은 바들과, 카페들과, 공연들이 끝나는 늦은 밤, 거리의 사람들은 피곤에 찌든 지친 몸으로 휘청거린다. 그렇게 공허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특유의 활기로 무장한 뉴요커들은 각자의 일터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그런 뉴욕의 극적인 모습이 좋았다. 바쁜 척 하지만 외롭고, 외로운 척할 시간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뉴요커처럼 보이고 싶었다. 이방인으로서 그런 뉴요커들의 모습도 감미롭고 멋져 보였다. 뉴욕의 태생 자체가 애초에 이방인의 도시인지도 모르겠지만.


 쓸쓸한 밤의 공기가 아침이면 달라져 있었다. 이 도시의 속도에 맞춰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수많은 각오들 덕분에 뉴욕은 다시 깨어났고, 에너지가 넘쳤고, 반짝반짝 빛났다. 관광객들조차도 그런 기운을 받아 발바닥 아프도록 걷고 또 걸었다.


 지금은 어떨까. 길게 드리워진 이 어둠의 시간이 끝나면, 사강이 빗대어 표현했던 것처럼,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키가 크고 젊고 요염한 아름다운 금발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0년 전 이맘때 센트럴 파크를 매일같이 산책했던 그때의 뉴욕, 그때의 내가 그립다. 가을이라 더욱 그립다. 뉴욕의 가을, 내년에는 다시 뉴욕을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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