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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May 04. 2023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화 중 설명하기 귀찮아질 때마다 손쉽게 찾게 되는 대답이 있다.

"나 원래 그래."


게으른 대답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찾게 되는 것은 편리한 만큼 그럴듯해서 일테다.

"원래"는 등에 과학을 업고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유전자나 가정환경이 져야 할 몫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면 나는 마법처럼 결백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세상으로부터 비슷한 답변을 자주 들어왔다. 우리 사회가 왜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지 질문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이 돌아온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자연의 섭리나 과학의 원칙이 근거가 될 때 우리는 입을 다물게 된다. 원래부터 당연한 것은 감히 반박하기에 너무나 사실인 것이다.


<차이에 관한 생각>의 저자인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인간 사회의 가부장제가 개코원숭이 사회를 근거로 정당화되는 과정을 서술하며 남성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이 당연한 논리로 작용하는 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연의 질서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사회적 해석을 거쳐 어느 정도 과장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이제는 개코원숭이 사회의 위계적 구조가 다른 영장류를 포함한 개코원숭이 사회에조차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자연에서 협력의 사례를 발견하게 되면서 과학자들도 노골적인 폭력과 경쟁에 반문하게 되었고, 친절과 다정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고 주요 담론이 대체되며 사회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화하는 과정을 우리는 끊임없이 목격하고 경험한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강조되던 지배구도는 삶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자연은 다른 길도 보여주는데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운운하며 현상을 유지한다.


원래 그렇다는 논리를 편리하게 사용해 왔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원래 그렇다고 대답할 만큼 나의 본성을, 그리고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텅 빈 문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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