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urosis and Human Growth(pp. 155-171)
호나이는 자기소외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비유합니다
이전 장들도 쉬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6장 자기소외는 많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 욕구, 소망 등이 부인되고 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강박적으로 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자기소외라 칭한 것 같고요.
논의의 디테일이 중요한데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디테일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1. 자기소외가 필연적으로 자기혐오를 야기하고 진짜 자기가 되려 할 때마다 괴로움을 느끼기에 진솔한 내적 경험을 둔화시키려 하기 쉽다는 부분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신경증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는 경험을 하고 자기혐오가 극도로 심해져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 해리를 경험할 수 있고요.
2. 모든 감정 경험이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를 고양하기 위한 방식으로 인위성을 띠게 된다는 부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은 난공불락의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사람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취약해진다는 것의 다름이 아닙니다. 이에 신경증적 자부심은 태생적으로 감정 경험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신경증적 자부심에 타격을 입었을 때뿐이라는 설명이 와닿습니다. 또한 이렇게 괴로움을 느끼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강박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그럼 더 수렁에 빠질 뿐이겠죠) 괴로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을 때 진짜 자기를 되찾는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오늘날의 심리치료의 한 포맷을 떠올리게 됩니다.
3. 신경증에서의 에너지 가용성(The availability of energies)을 논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가용성이라니 이해가 되시나요? 처음에는 여러분처럼 저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의 가용성이라는 것은 삶의 가용한 에너지가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와 진짜 자기(real self) 중에 어느 곳에 투여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에너지가 전자에 전적으로 투여되고 있을 때 진짜 자기를 위한 에너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설령 에너지가 조금 남아 있어 스스로의 소망/열망을 좇으려 하면 금세 극도의 피로를 경험하기 쉽습니다.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는 진짜 자기에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4. 자발성이 전혀 없이 신경증적 자부심 체계를 굳건히 하기 위한 강박적인 추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자기소외인데, 실상 스스로의 소망이나 느낌에 근거한 삶의 의미나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우유부단하거나 굴종적인 태도, 통제적인 태도 등이 우세해지면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동인형 같은 모습을 띠기 쉽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어느 것도 사실 진짜 자기와는 거리가 먼 삶이지만 이런 기존의 대처 양식을 버린다는 것은 공포를 야기하기에 잃어버린 진짜 자기를 자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됩니다.
5. 이번 주 마지막 분량에서는 책임감의 문제를 논합니다. 자기소외는 자기 삶의 책임을 거부하는 것의 다름이 아닙니다. 주어진 당위를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미친 부정적 영향을 인지하지 못하며, 인지를 못하기에 타인이 왜 분개하는지도 공감할 수 없습니다. 합리화나 주지화, 투사 같은 방어기제를 사용하기 쉽습니다. 결과적으로 진짜 자기는 더 약해지고 삶에서 더 멀어집니다.
현재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경험하는가>를 같이 읽고 있습니다. 카렌 호나이와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서 유사한 면이 많아서 검색을 좀 해보니 두 사람은 연인이기도 했던 것 같네요. 에리히 프롬도 호나이처럼 우리가 좇는 이상이나 목표가 실상 우리 스스로가 정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고 봅니다. 자아 혹은 진짜 자기를 상실한 채 타인이 내게 기대한다고 지각한 어떤 허상('네가 원하는 나')을 좇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거죠.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 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덜 불안하지만 삶은 좌절한다고 프롬이 말합니다. 이 글의 첫 문단에서 말했듯이 호나이도 당위의 폭정이 자발성과 개성을 말살하며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이 되라고 미친듯이 몰아붙인다고 봅니다. 진짜 자기의 감정이나 소망을 경험하기 어렵게 되고, 이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지닌 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