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백야행
35살을 워킹홀리데이 자격으로 받아주는 나라는 단 3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내 취향은 아일랜드다.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현빈이 진국으로 잘생겼기 때문이다.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에서 보라색 히스꽃이 가득 핀 아일랜드 들판을 봤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아일랜드는 우울하다. 아일랜드에 살던 이나영은 갱단에 온 가족이 총살당해 한국으로 도망쳤고, 친한 동생의 약혼자와 바람 난 유부녀 고현정은 아일랜드로 떠나 질리도록 청승맞게 살았다.
근데 왜 취향이냐고? 그냥 그게 내 패티쉬다. 나는 직업조차 보디가드고, 기복이 심하고 불안정한 애인을 '돌보는 것'이 삶의 이유인, 그런 방식으로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현빈이 좋았다. 유부녀면서 친한 동생의 약혼자인 연하남이랑 더블 바람 나서 쓸쓸하고 아름다운 춥고 넓은 집에서 그림 그리는 고현정과 그의 어린 애인이 좋았다. 존나 좋았다.
내가 아일랜드에 대해 아는 것은 1. 현빈 2. 고현정 3. 모허 절벽뿐이었다. 티켓은 편도. 18시간의 비행 끝에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큰 꿈 없이 그러나 자잘한 희망을 안고.
이민국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3개월을 대기하랬다. 그마저도 겨우 잡은 일정이었다. 그동안 일을 못한다. 돈 떨어지면 한국 가야 하는데 큰일이다.
나는 부자들의 별장이 줄줄이 늘어선 바닷가 마을에 가서 2만 원짜리 토스트를 먹다 좀 운다. 난 원래 피곤할 때 아름다운 걸 보면 운다.
아일랜드에서 제일 이상한 건 하늘이다. 일주일에 5일은 부옇게 흐린 이 나라의 천장. 하늘이 닫혀 햇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비닐하우스 안처럼 희끄무레한 공기 속을 부유한다. 물에 젖은 듯 느리게 움직인다. 그들 곁에 각자의 우울이 쌍둥이처럼 함께 있다. 나의 우울도 나를 따라 걷고, 벤치에 앉고, 버스를 탄다. 나는 차창에 비친 우울을 본다. 너무 잘 보여서 오히려 온순해지는 것 같다.
거리엔 우산 없이 비를 맞는 시큰둥하고 담담한 사람들. 나는 금방 그들 사이에 비슷하게 서있게 된다. 왜냐면 우울은 나의 취향, 나의 오랜 취향이기 때문이다.
어떤 스페인 남자에게 실은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싶었어, 했더니 그가 그럼 왜 여기 있어? 되물었다. 그야 바르셀로나는 꿈이고 여긴 취향이니까. 그것도 모르면서 넌 왜 여기 있어?
20대에 첫 유럽 여행을 하고 나서 30대 중반이 되면 바르셀로나에서 살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해변가에 색색의 쪼리를 실은 트럭을 대놓고 관광객에게 팔면서 설렁설렁 살고 싶었다. 지금이 꼭 그 나이다. 그런데 여전히 바르셀로나에선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아일랜드에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가 결국 내게 문을 열어줄까? 모를 일이다. 아무튼 길을 걸으며 딱딱한 빵을 씹으며 두어 겹의 잠옷을 껴입으며 중얼거린다, 서바이벌, 서바이벌 럼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