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연애 시장에 진출하세요

by rummbl


첫 데이트 상대는 브라질인이었다. 한국을 벗어나 영어권 나라로 온다는 건 전 세계 연애 시장에 진출한단 뜻이었다. 더블린엔 체감 상 외국인이 훨씬 많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아일랜드 사람이란 대답이 돌아오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우리는 세제, 물, 음식, 모든 걸 온라인으로 구매한다. 난 당연히 애인도 온라인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십 대 후반 트위터에서 만난 사람과 1년 넘게 연애한 이력이 있는 나로선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어떤 수고를 동반하는지 안다.


일단 온라인의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머릿속의 수많은 환상과 바람이 가상의 상대를 구성한다. 이미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그러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쌓아 온 모든 마음이 붕 떠 갈 곳을 잃는다. 무전기로 시공을 넘어 연결된 김하늘과 유지태가 아니라면(레퍼런스가 너무 낡았네요) 하루빨리 만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게 상책이다.


아무튼 첫 데이트 상대는 브라질인이었다. 그는 유머러스했고, 밤 12시까지 당근 케이크를 구웠으며, 데이팅앱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내가 살면서 만난 어떤 사람보다 말이 잘 통했다.


그는 '리우'라는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그건 내가 나름대로 즐겨본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에 나오는, 좋아하는 캐릭터의 코드네임이기도 했다.


드라마 <종이의 집>의 리우


리우는 주인공 '도쿄'의 애인인데 뜨겁고 순수하고 충동적이고 사랑을 위해 울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아직 소년의 얼굴을 간직한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리우를 사랑했다. 도쿄도 리우가 그런 사람인 줄 알면서 사랑했고 그 때문에 사랑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끝내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바로 그 장면에서 도쿄의 긴 편지 같은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나의 작은 리우'로 시작되는.


능숙하지 않은 이가 건네는 순간의 춤과 같은 마음 앞에서 홀로 미래를 감각하는 도쿄의 목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그 드라마를 볼 때 사귀던 애인에게 몇 번 '나의 작은 리우'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아일랜드 땅을 밟자 진짜 리우에서 온 소년이 나타난 거였다. 나는 이 상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다만 '운명'이라거나 하는 식의 귀여운 생각은 안 들었다. 운명 같은 건 혼자 직감해서 성사되는 것도 아니고, 보통 한 사람 이상의 동의와 노력이 필요하단 걸 알아서였다. 삶은 구체적면서도 암시적이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과대해석할 수 있었다.


몇 가지 키워드를 엮어 호들갑 떠는 건 재밌지만 지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젠 누군가와 운명적으로 연결될 표식을 열심히 찾기보다, 혹여 그런 착시에 속을까 실눈을 뜨고 차창밖을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가끔 좀 시끄러운 창을 만날 수 있지만 당신 잘못이 아니다


약속 장소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깨달았다. 이 데이트는 실패다. 거의 모든 온라인에서 만난 상대와의 데이트가 그렇듯.


아무튼 우리는 별의별 얘기를 다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랑 동갑인 것도 알게 됐고, 포르투갈어도 배우고, 그가 26살인 것도 들었다. 나는 35살이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면, 알겠는데, 만나기 전에 한 번은 말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는 어플에 적혀있다.


내가 예전에 쓴 글에 대한 얘기도 했다. '바나나'에 관한 글이었다. 그걸 쓸 때 나는 20대였고, 바나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너무 많아 나의 청춘처럼 무색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눈부시다고 말하는, 모두가 가져본 적 있어 쉽게 아는 척하는, 위험도 불안도 미화되는 그 시기가 어디나 흔하게 널린 푹푹 썩어가는 바나나 같았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자연스레 "그래.. 바나나는 너무 많지."라고 답했다. 별생각 없이 들어 넘겼는데 알고 보니 브라질이야말로 지천에 바나나가 널린 바나나의 나라였다. 딱히 공들여 키우지 않아도 한 해에 몇 번이나 같은 나무에서 바나나를 수확할 수 있고, 한송이에 수십 개의 바나나가 열린다고 했다. 밥과 함께 바나나를 먹는 일도 흔하댔다.


와, 이 만남이 성사됐다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그는 진짜 '나의 작은 리우'가 됐을 거고, 그 글이 가진 바나나의 의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을 거고, 내가 지루하다 여겼던 이제는 그리워하는 그 시기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었다.(그의 나이가 내가 그 글을 썼던 나이다) 어쩌면 나는 그를 지나간 나의 한 때처럼 여기며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모든 의미가 아작 난 건 오직 그의 외모가 내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라인에서 만난 상대와의 데이트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이다. 상대가 연쇄살인마 거나 장기적출범일 가능성보다 이미 조금 좋아해 버렸는데, 막상 만나니 그렇지 않게 되는 편이 훨씬 가능성 높다.


그러니 삶의 기호를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각자의 선택이다. 예를 들면 신문에 그려진 숨은 그림 찾기를 할 때(레퍼런스가 정말 낡았네요), 키워드 '국자'가 있을 때, 애매하게 J모양으로 꼬부라진 것을 서너 개는 찾을 수 있다. 그중 두어 개는 정말로 국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볼펜으로 동그라미 치면 그건 국자가 된다. 그냥 그는 나의 국자가 아니었을 뿐.


그는 내년 1월로 잡힌 내 비자 인터뷰 스케줄을 듣고, '일정 변경' 버튼으로는 결코 새 슬롯을 예약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신청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덕분에 나는 지난주에 기적적으로 비자 인터뷰를 마쳤다. 이 영광을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내겐 또 하나의 브라질인이 남았다. 그 역시 데이팅앱에서 매칭된 사람이다. 아, 혹시 리우에서 왔는지 물어봐야겠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게 이 말을 건넨다. 어쨌거나 쇼머스트고온 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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