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와 직녀' 말고 '로미오와 줄리엣'

by rummbl


언제나 '엥?'이다. 한 해의 끝에서 '여기까지 왔구나', '수고했다'가 아니라 그냥 '엥?'.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고 몇 개월 뒤의 일조차 계획하지 못하고. 매해 점점 더 황당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아일랜드의 좁고 추운 방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스코틀랜드 남자친구가 생겼다. 당연히 M은 스코틀랜드에 살고, 나는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에 다녀왔다. 평생 뭔가 아껴본 적 없지만 그중 가장 방탕하게 써버린 게 있다면 시간이다. 그런 나도 몇 날며칠 놀고먹으며 애인이랑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 보면 죄책감 비슷한 게 드는데, 그럴 때 꼭 견우와 직녀 전래동화를 떠올린다.


사랑에 빠져 놀고먹는 연인이 괘씸해 다시는 만날 수 없도록 하늘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찢어 놓는 동화. 일 년에 단 한번 만날 수 있는 연인의 슬픔과 기쁨의 눈물이 7월 7석 세상에 비를 내린다는 이야기. 한마디로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건데, 동화라는 점에서 학대라고 본다.


M에게 너의 10대는 어땠냐고 물으니 개쩔었다고 했다. 매일매일 파티가 열리고 친구들과 다니면서 이상한 짓들을 했다고. 개억울 했다. 10대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보라색 립스틱으로 이마에 낙서를 새긴 뷰티풀 보이 시절 인증샷을 보니 스킨스의 한 장면 같고 구라는 아닌 것 같았다.


M에게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하면서 너네 나라에 비슷한 동화가 있냐고 물었다. M은 "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했다. 내가 이거랑 그거랑 어떻게 같냐니까, M이 견우와 직녀가 더 좋은 이야기라고했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속되고', 비록 '영원히 제한'되지만, '끝나지 않기' 때문에. 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빠르게 타오르고', '비극적이며', '끝나버린다'고.


아무튼 올해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말 안 통하는 나라에 와 깨달았다. 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멈출 수 있다. 행복한 곳에 다다라서가 아니라 어딜 가든 조금 불행하다는 걸 알게돼서다.


해피 뉴 이얼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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