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노점의 어떤 위로
이상하리만치 바빴던 한주였다. 오늘이 드디어 그 한주의 마지막이라는 말은 진부할까.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가득한 한주였고, 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대기 어려운 먼 직장상사의 상갓집을 끝으로 이번 주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집 앞 계양역을 마지막으로, 온종일 나를 따라다니던 하얀 햇빛 또는 하얀 LED등을 헤치고 나온다. 오묘하게 붉은 노을이 역 앞에 평행하게 펼쳐있다. 그리고 그 귀퉁이엔 너저분한 과일 노점이 하나 있다. 역 앞 광장의 유일한 노점으로, 주인이 유난히 지독스럽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안쓰러워 법조차도 집행할 수 없는 그런 존재 같다. 주인은 더는 바랠 색도 없어 보이는 낡은 파라솔 서너 개를 겹쳐놓고 그 아래 여러 과일 상자들을 쌓아 동굴을 만들어 놨다.
동굴 안에는 굽은 허리의 할아버지가 복숭아색 카라티를 입고 연신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혹시나 ‘어서 오세요’라 반기는 건 아닐까 걱정돼 나는 힐끗 훑어만 본다. 도보 앞까지 쌓아놓은 복숭아 상자들, 그 앞에는 상자 한쪽 편을 주욱 찢어 ‘복숭아 세일’이라 적어놨다. 몽당 매직펜으로 떨림 없이 정갈하게도 써 논 저 글씨들은 누가 쓴 걸까. 저 할아범의 아들일까 할멈일까. 그들은 할아범의 과일 노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은 저 과일가게가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아마 한 주 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논리와 숫자 그득한 일에 치여서 억지 감수성을 찾았었나보다. 충분히 지친 내 모습을 마주 보기 싫어서 내가 아닌 다른 이에 대한 동정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 또 맘대로 그 할아범이 주인공인 인간극장 하나를 머릿속에 그려버렸다.
하지만 이건 값싼 동정이고 이기적인 잡생각이었으며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었다. 내 마음의 자위를 위해 타인을 절하 해버린 것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기 전에 생각을 멈춘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으니 큰 숨이 나온다. 이제 정말 집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미뤄둔 시집을 읽다 자야겠다. 곡비는 시인의 숙명이라던 시인들은 나를 위해 거기서 대신 울어줄 것이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리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의 이야기로 하루만 힘껏 슬퍼야지. 그리고 오늘 저녁은 이렇게 궁상이라도, 내일은 점심 한나절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