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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엄마 Aug 12. 2020

전지적 변기 시점, 똥이라도 속 편하게 싸고 싶다

오늘 에세이는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짠!


전지적 변기 시점의 아들과 그의 절친들


제목과 사진에서 어떤 상황인지 대략 감이 오시나요? 네, 맞습니다. 그야말로 전지적 변기 시점에서 저희 아들과 그의 절친들 모습이네요. 저는 오늘도 변기에 앉은 채 이들의 결투를 끝까지 지켜봐야 했습니다. 하~아.



엄마, 엄마? 엄마!


요즘 들어 유난히 엄마 바라기가 된 여섯 살 둘째는 제가 30초만 안 보여도 저를 찾습니다.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그럼 저는 보통 바로 대답을 해요. "응, 엄마 여깄어." 그런데 가끔씩 제가 소리를 못 듣거나 대답을 못 할 때가 있어요. 그럼 여지없이 특유의 짜증과 징징거림이 발사됩니다. "아아니이~ 나 혼자 놓고 가면 어떡해!"


아홉 살 첫째라고 크게 다르지 않네요. 그나마 둘째보다는 낫지만 집에 같이 있어도 거실에 혼자 있는 건 무서워하고 제가 방에 있을 때면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놔야 하고요. 아직은 혼자 심부름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 제가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올 때도 CCTV로 저를 내내 지켜봅니다. 이쯤 되면 스토킹 수준이죠. 하하.


그래서 올해 2월부터 코로나 집콕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하루에 엄마 소리를 정말 오백 번은 듣는 것 같아요. 그나마 둘째가 6월부터는 유치원에 정상 등원을 시작해서 한결 수월해지긴 했지만, 지난 2주 동안 방학이라고 내내 집에 있다 보니 또다시 오백 번 엄마 콜링이 재생됐습니다. "엄마, 엄마. 엄마!"


그러다 제가 며칠 전에 대폭발을 해버렸어요. "엄마 좀 그만 불러, 쫌!" 순간 애들은 완전 얼어버렸죠. 우리 착한 둘째는 "엄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순간 또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대체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요즘은 이런 사이클의 연속이에요. 힘들고 피곤한 거 애들한테 짜증 내고 다시 사과하고.



분노의 정체


요즘 제가 그래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내고 짜증 내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제대로 타고 있네요. 워낙에도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인데 도통 자유시간이 주어지질 않으니 더 심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요사이 곰곰 생각해봤어요. 내 안의 분노, 그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것일까.


그랬더니 단어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르더라고요. 인정.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나 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내가 정말 똥 하나도 속 편하게 못 싸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그걸 아무도 안 알아주니 너무 화나고 속상했던 것 같아요. 참 유치하죠. 그게 뭐라고. 애들 키우고, 살림하는 건 당연히 제 몫인데요. 번역 일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는데 마흔 앞두고 마흔 앓이를 하는 건지 유난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라고요. 아마 결혼 10년 차라는 현실이 겹쳐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단물, 쓴물 다 맛본 10년 차 결혼생활. 거기에 내년이면 마흔이라는, 내 청춘 다 지나가버린 듯한 허무함. 그런 것들이 겹쳐서 한꺼번에 온 것 같아요.



물만 셀프가 아냐, 행복도 셀프야!


이렇게 분노에 찬 하루하루를 보내던 제가 오늘 완전히 제 귓가를 빵! 하고 때리는 듯한 영상 하나를 보게 됩니다. 세바시에 출연한 개그우먼 김효진 님 영상인데요. 저랑 아주 비슷한 경험을 하셨더라고요. 그분도 마흔 즈음에 저처럼 인정에 대한 욕구 때문에 심하게 앓으셨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목이 너무 마른데 여태껏 누가 물 떠 다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구나. 내가 가져다 먹을 생각은 안 했었구나.'


그때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완전히 바뀌셨다고 해요. 누군가 물 떠주기만을 기다리면서 목이 마르다고 화낼 게 아니라 스스로 물을 찾아 먹을 줄 아는 삶.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삶. 그렇게 본인이 바뀌자 남편도 가족도 조금씩 바뀌며 안정을 찾았다고 해요.


행복도 셀프. 이 말 참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요즘 번역하는 책이 워킹맘의 행복에 관한 내용인데요, 거기도 비슷한 말이 나오더라고요. 행복은 선택이다. 행복은 물리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선택 문제라는 거죠.


나는 똥 하나도 속 편하게 못 싸며 죽어라 열심히 사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거야! 불평하고 불만할 게 아니라 아내로서 엄마로서 맡겨 주신 사명을 깨달아 하루하루 그것을 실천해가는 삶. 내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쉽진 않겠죠. 그럼에도 내가 이 세상의 전부이자 우주인 우리 아이들이 있기에 다시 힘을 내 봅니다. 엄마 소리 500번 하면 어떻습니까, 그까짓 것 똥 좀 편하게 못 싸면 어떻습니까! 엄마의 때, 엄마의 자리를 지키는 게 지금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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