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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연 Jan 11. 2021

시댁 트라우마, 생각보다 상처가 깊다.

'설거지 사건'이 지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물론 내 입장에선 이해 안 되는 일 투성이었지만 표면적으로 해결된 일이라 마음속에 잘 묻어두기로 했다. 


남편이 인터넷에서 산 운동화를 시댁으로 주소를 잘못 쓴 바람에 찾으러 가려했다. 


남편은 시어머니께 카톡을 해서 내일 점심에 본가로 잠시 들르겠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굳이 오후 4시에 오라 하셨다.

남편은 주말인데 오후 4시에 가면 하루가 다 날아간다며 애매한 시간이라 점심때 간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결국 "너 한 달 만에 집에 오는 거 아니? 4시에 와!"라고 다그치셨다. 


남편은 엄마가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파악하고, 내일 혼날 것을 예상해서인지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남편은 그날 3시쯤 시댁으로 갔고, 나는 미리 예약해둔 미용실을 갔다. 


저녁 6시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보라 했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남편이 시댁 본가에 갔더니 분위기가 싸했다고 한다. 

한 달 전에 '설거지 사건'이 있었을 때 남편이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고 한다. 

내가 알기론 분명 남편이 전화로 시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안다. 


남편도 시어머니께 나 사과했는데 무슨 말이냐 하고 반문했더니, 전화로 하는 거 말고 직접 얼굴 보고 사과를 안 했다며 서운해하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사과를 한 박스 보내주셨는데 그걸 받고 내가 고맙다는 말을 안 해서 또 서운했다는 것이다. 


근데 그 또한 남편이 고맙다고 전화를 했었다. 근데 내가 전화를 안 해서 서운하셨다고 한다. 

도저히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사과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분명 사과는 시어머니가 보낸다고 우기셔서 보내신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과를 받고선 두 달이 넘은 지금도 아직 다 먹지를 못했다. 

신혼부부 둘이서 사과 한 박스를 어떻게 빨리 먹을 수가 있나. 나로서 그 사과는 받아도 숙제처럼 먹어야 하는 짐이었다. 


근데 그 사과를 받고 내가 고맙다고 전화를 안 해서 서운하셨다고 한다. 

갑자기 또 열이 뻗쳤다. 


"도대체 내가 너희 부모님한테 잘못한 게 없는 거 같은데 뭘 얼마큼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번 주에도 나랑 통화하신 분들 아니냐, 나한테 서운한 게 있으면 직접 말을 하시지 왜 그걸 너를 불러다가 꾸짖으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남편은 그런 게 아니라며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서운하다기보단 화가 났다. 더 이상 시댁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거창한 건 아니더라도 시댁에 갈 때마다 조그마한 선물을 들고 갔고, 시아버지가 며느리 전화를 받고 싶다고 시어머니가 하도 강조를 하셔서 주기적으로 전화도 했다. 


근데 도대체 내가 무슨 도리를 못해서 이렇게 욕을 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룰을 정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 더 하기가 싫어졌다.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과받고 전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마음에도 없는 그런 전화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사과를 받고 전화를 하든 말든 그건 나의 자유야. 며느리라는 이유로 내가 전화를 꼭 해야 하는 의무는 없어. 그리고 네가 전화했으면 됐지, 꼭 나까지 전화해서 고맙다고 합창을 해야겠니? 그리고 너는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시부모님한테 내 편도 안 들어주고 변론도 못해주고 너한테도 너무 실망이다."



남편이 시댁에 가서 듣고 온 말, 그리고 남편도 어차피 시댁 편이구나 라는 생각이 

나에게 너무 큰 화살이 되어 '설거지 사건'의 응어리와 함께 곪아 터져 버렸다. 


나는 일주일 내내 밥도 거의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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