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현지씨는 회사에 후배가 없다. 광고 기사를 쓰는 에디터란 기사보다는 광고에 90%의 포커스를 두는 광고 영업사원과 별 다를 게 없다. 광고든 기사든 이런저런 사람들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건 매 한 가지지만 광고 기사를 쓰는 건 뭐랄까, 음.. 훨씬 더.. ‘짜친다’. 10만 원부터 1억 이상을 지불하는 각기 다른 재산의 규모만큼 다양하고 괴상한 성격의 광고주뿐만 아니라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위풍당당을 넘어 뻔뻔한 영업팀, 실제로 가진 것보다 과장하는, 과대포장의 천재, 슈퍼 어벤저스 마케팅팀까지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밑에 부하직원 한 명만 있어도 그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의 상당수는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김과장이 힘써서 은아 선배를 위해 현지씨를 채용했듯이 말이다.
‘은아 선배가 잘려야 나에게 이득일까? 아니면 은아 선배에게 일거리를 모조리 떠넘기는 게 더 편할까?’
현지씨는 은아 선배와 김과장의 불륜을 알게 된 후에 자신의 스탠스를 어찌 취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왜 매번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솔로몬에게 넘치도록 있는 지혜 비슷한 것이라고 단 하나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걸까. 지혜란, 타고난 유머감각처럼 유전적으로 지니고 태어났어야 하는 걸까?
“야 박종. 긴급. 우리 회사 불륜커플 있잖아. 내 선배. 이 사람 잘리면 내가 승진하는 거냐? 회사에서 내 밑으로 바로 사람을 뽑아줄까?”
결국 현지씨는 중학교 때부터 베스트 프렌드인 공무원 박종에게 SOS를 쳤다. 박종은 작년에 7급 공무원에 합격한 후로 1분 이내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한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로 바뀌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그 과장이란 놈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가?”
아 맞다. 김과장. 현지씨는 김과장에 대해서도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단순히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기에는 현지씨는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은아 선배는 지난주 김과장과 출근하는 걸 현지씨에게 들킨 후로 말투가 사근사근해졌다. 하지만 확증은 없을 테니 너무 저자세로 가지 말자고 김과장과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은근히 재수 없는 건 여전했으니까. 애드팀과 총무팀이 종종 함께 모여서 먹는 점심 회식 자리에선 근거 없는 촉을 믿는 것이 위험한 이유에 대해서 또 한 번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 T인가봐. 증거 없이 감정적으로 확신하는 거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거 아냐? 재회 컨설팅 그런 거 다 자기 똥촉이잖아. 혼자만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착각?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존감이 낮은 거야. 다들 너무 오버띵킹이야. 팩트만 믿어야 탈이 없단 말이지.”
현지씨는 생각했다. ‘나는 촉이 아니야. 증거가 있다고’. 미국 트레이더조 스파이시 차이라떼를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은아 선배는 뭐라고 답할까?
“현지~ 우리 마케팅팀에서 탄산음료 브랜드에 기획 기사 제안한다고 한 거, 자료조사 보고서 잘 되고 있어? 왜 보고를 안해에~?”
“아, 선배. 저 죄송한데 내일 연차 좀 쓸게요. 아침부터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은아 선배는 보고서 기한에 대해서 한 번 더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그것이 적합하고 합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음에도 평소대로 대하기에는 현지씨의 기류가 변한 게 느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에 “아 그래? 그럼 내일 연차 쓰고 오늘도 그냥 조용히 먼저 들어가. 벌써 4시 넘었네 뭐.”라고 작게 소곤거렸다.
“감사합니다! 선배는 정말 선하세요!”
현지씨는 주간현재경제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사무실 직원들은 그런 현지씨를 보고 “어머 뭐야 현지씨~ 제일 밝아!”라는 둥, “현지씨 처음 보는 텐션”이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현지씨는 억지 미소를 유지하며 자동차 와이퍼가 왔다 갔다 움직이듯 화려하게 두 손을 흔드는 동시에 고개까지 90도로 숙여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