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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도 Apr 12. 2024

#3 촉이 발동되는 곳은 언제나 그곳

소설 연재

현지씨는 예민한만큼 촉이 좋다. 은아선배는 공공연히 현지씨의 촉을 깎아내리곤 했다.  “촉? 그거 뭐 사실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영영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는 채로 끝나는 거 아니야? 혼자서 자기가 맞다고 자위하면서. 그래서 난 촉 안 믿어.”


현지씨는 알고 있었다. 은아선배에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은아선배는 누구보다 현지씨의 눈치를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다. 현지씨는 뭔가를 숨기는 듯한 은아 선배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무엇을 감추기 위해 하루종일 신경이 곤두서있는 걸까. 다만 은아선배는 촉이 꽝인 대신에 누구보다 치밀해서 빈 틈이 없었다. 


현지씨는 퇴근 후 사무실에서 가끔 책을 읽거나 지키지 못할 계획을 짜곤 한다. 혼자서 늦게 퇴근하는 고요함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딱히 일관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대체로 매일 지옥철도 마다하지 않고 칼퇴를 희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집에 가기 위해 몸을 사선으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면서 히터 리모콘을 조종할 때였다. 오른쪽 은아선배 자리가 훤히 보이는 익숙한 시야 반경에 불편하게 눈에 탁 하고 걸린 낯선 물체가 눈에 띄었다. 은아선배 책상에 트레이더 조스 스파이시 차이라떼 원형 통이 올려져있었다. 


트레이더조는 미국에서 인기있는 슈퍼마켓 브랜드로, 요즘 한국에서도 트레이더조스 제품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몇 년 째 해외직구 인기순위 상위권에 올라있다. 현지씨는 미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미국 트레이더조스에서 반드시 구입해야할 제품 10가지 리스트를 여러 번 읽었다. 마치 슈퍼마켓 때문에 미국에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아선배는 해외직구는커녕 온라인 쇼핑도 잘 하지 않는다. 갤러리아 명품관 VIP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서 명품 가격에는 고급스러운 매장 분위기와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이 포함되어있다는 자기만의 논리로 오프라인 쇼핑을 즐겨했기 때문이다. 매주 2회씩 압구정동에 가면서 가끔 현지씨에게 같이 가자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현지씨는 곤란한 제스처를 곁들여가며 거절했다. 


그러니 은아선배 책상에 놓인 트레이더 조스의 인기상품은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것이었다. 월요일에 여름휴가에서 복귀한 김과장이 준 게 틀림없었다. 김과장은 매년 여름에 가족들과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고 단 한 번도 기념품이나 선물을 사오지 않아서 원성이 높았다. 사무실에는 휴가에서 돌아올 때마다 기념품을 사오는 게 이미 관행처럼 굳어져있었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논지가 있는 사안이었다. 부담없는 가격 선에서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소소한 정 아니겠냐는 선물파와 아무리 작은 거라도 챙기려면 신경쓸 게 많으니 하지 말자는 현실파로 나뉘었다. 후자의 대표격인 김과장이 기념품을 사왔다고라. 


현지씨는 스파이시 차이라떼 통 사진을 찍었다. 은아선배 명패가 마침 배경에 선명하게 나왔다. 다음날 현지씨는 새벽 6시에 출근했다. 따분한 일상에 드라마가 펼쳐진다면 굳이 티비를 꺼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안테나를 곤두세우는 게 바로 현지씨다. 오해할까봐 덧붙이자면 필자 역시 현지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안다 싶을 때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격이라는 것이 예측가능한 영역이라면 한 사람을 10년 동안 매일 만나서 연구해야지만이 어떤 인간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출근시간 3시간 전이었다. 멀리 복도 끝에서 “열렸습니다” 자동문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남녀의 웃음소리도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지씨는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과장님, 나 화장 뜨지 않았어요? 내가 쓰던 팩트가 아니라서 신경쓰여.”


은아선배 목소리였다. 현지씨는 목소리들이 다가오자 한 손으로 무릎을 탈탈 터는 시늉을 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지씨의 시선은 마치 장님처럼 사물의 정수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분명한 건 말이 360도 넘어의 시야를 볼 수 있듯 빗나간 초점으로도 현지씨는 그들의 당황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현지씨는 환하게 인사했다. “어~ 일찍오셨네요. 굿모닝입니다!”


책상 밑에 쭈구리고 있을 때부터 꼭 움켜쥐고 있던 텀블러를 들고 총무팀 옆에 위치한 공용탕비실로 유유히 걸어갔다. 그렇게 30초 쯤 지났을까. 은아선배가 작아지고 있는 현지씨 등뒤에서 그제서야 인사를 한다. “어어~ 현지씨 굿모닝~ 일찍왔네?” 그동안 단 한번도 서로 나누지 않은 아침인사였다. 콧바람이 세어나오면서 입가가 미소로 가득해진 현지씨는 간신히 탕비실 문을 쾅 닫고나서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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