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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도 Apr 23. 2024

#6 솔로몬의 해결책

소설 연재

현지씨는 박종의 해결책을 따를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다.


“니가 그나마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어.” 


“그게 뭐냐고 대체”


“존나 친해져 버리는 거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라. 3년 동안 은아선배와 단 둘이 밥을 먹은 적도 없고 카카오톡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무슨 이유에선지 은아선배와 인간적으로 친해진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아선배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친해지지 않은 것도 이상하긴 하다. 


은아선배는 꼰대도 여우도 악마도 무능력자도 아니지만 아슬아슬하게 그 모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친척들이 결혼 언제 하냐고 물은 이후로 아예 발길을 끊었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은 MZ세대 인턴조차 서운하게 느낄 정도로 절대 묻지 않는 건 멋있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차라리 대놓고 꼰대인 사람은 꼴불견이긴 해도 밉지는 않다만 은아선배는 뭐랄까 긴가민가한 지점이 많아서 오히려 그렇게 느낀 당사자가 자신에게 잘못이 있나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저번에 다 같이 밥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실 때 차사원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카키색 야상을 주문했는데 쇼핑몰 실수로 똑같은 야상 2개가 배송이 된 이야기를 꺼냈다. 웬 떡이냐 싶어 하나를 곧바로 친구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경리답게 재테크 야무지게 한다고 다음에 커피나 쏘라며 다들 웃으면서 한 마디씩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한 달 후 은아선배가 친한 판매원의 실수로 다른 컬러의 백이 주문돼서 친구에게 선물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나는 친구면 내가 손해 보더라도 그냥 다 내주는 편이야. 돈 몇 푼 받아낸다고 내가 부자가 될 리 있겠어? 악착같이 받아내 봐. 그게 진짜 우정일까 의심하겠지. 나는 사람 잃는 것보다 내가 더 주는 게 편하더라고~” 


현지씨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차사원의 표정을 살폈다. 차사원은 다소 과장해서 뜨거운 드립커피잔을 거의 수직으로 들어서 들이키고 있었다. 은아 선배는 말을 끝내고 우아하게 눈을 아래로 깔며 샤넬 실버링이 끼워져 있는 양쪽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저격임을 눈치챈 차사원은 커피타임이 끝나자마자 사내 메신저로 은아선배는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인간이라고 절대 가까이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자기가 무심코 했던 말들을 뒤에서 얼마나 욕했을지 순진한 얼굴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고 상처가 크다고 했다. 


현지씨는 은아선배가 차사원을 은근히 무안 준 것은 잘못이지만 눈치 없는 사람들은 딱히 저격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사실 정말 무안을 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속으로 현지씨도 차사원이 공짜로 받은 걸 친구에게 팔았다고 했을 때 약간 놀라긴 했었다. 은연중에 박종이 그랬다면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고 찰나에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도 했다. 현지씨는 은아 선배의 미세하고 치밀한 돌발행동에 남몰래 공감하기도 하며 은아선배를 싫어하기에도 좋아하기에도 애매한 상태로 지냈던 것이다.


은아선배는 명품관에서 받는 대우와는 다르게 피부과는 확실히 VIP 회원이었다. 매 주기별로 보톡스는 기본이고 유행하는 주사를 쇼핑하듯 주입했다. 화장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이니스프리 그린티토너와 크림을 바르고 1+1으로 산 닥터자르트 미스트를 주기적으로 뿌렸다. 현지씨는 갈색병을 쓴 지 1년이 지났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은아선배의 피부는 깐 달걀처럼 윤기 나게 반짝거렸다. 피부가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남자 직원들은 은아선배 앞에서 유독 친절하고 다정했다. 쌍꺼풀은 없지만 새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충분히 보이는 크고 매력적인 눈, 필러 덕분인지 작고 오뚝한 콧날, 4겹 이상으로 립을 바르기 때문에 오묘한 코랄빛 레드로 뒤덮인 도톰한 입술은 피부를 제외하고서라도 예쁜 여자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기에 최소 20만 원 이상을 주고 사는 브랜드 옷과 각종 명품 신상가방에 구두까지. 머리빨, 옷빨까지 합하면 은아선배는 평범을 넘어선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요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왜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까? 현지씨는 박종의 조언을 따를지 말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불륜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그들과 싸우는 건 그들의 배우자가 도움을 청했을 때도 할까 말까 한 일이다. 괜히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친해지는 것 또한 양심상 공범자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적을 알아야 전진이든 후퇴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이유가 있겠지. 그 후에 판단하자. 알고 나서 공격하자. 


“선배,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현지씨는 은아선배와 처음으로 둘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점심은 둘이서 가끔 먹은 적이 있지만 은아선배는 꼭 김 과장을 포함해 여럿이 먹는 것을 선호했다. 둘 사이는 얼마나 오래되었고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현지씨는 그들의 불륜에 덤덤한 편이었는데 만약 친한 사이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했다. 실망했으려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현지씨는 은아 선배가 아는 장소가 있냐고 물었을 때 루프탑호프는 꺼내지 않았다. 불륜녀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은아 선배는 회사 근처에 있는 베이지색 작은 상가 지하에 있는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이자카야 링크를 보냈다. 현지씨는 알고는 있었지만 회사 사람들과 따로 술을 마신 적이 없어서 가본 적은 없었다.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는 게 소소한 취미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은아 선배 만나는 것보다 우선으로 두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무로 만들어졌나 싶게 통나무 콘셉트 인테리어에 핀 조명으로 바 테이블 위에 노랗고 흐린 불빛이 깔려 있었다. 바 왼쪽에 큼직하게 있던 어묵냄비에서 연기가 뽀얗게 올라오고 숯불닭꼬치의 고기향에 차가운 냉우동의 미세한 냉기가 어우러지는 것이 꽤 괜찮았다. 80년대 도쿄에서 울려 퍼졌을 법한 올드 시티팝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현지씨의 취향이었다. 이 가게 안에 있는 열댓 명의 사람들 중 사연 있는 사람 1위로 보이는 은아선배 얼굴만 빼면. 


은아 선배는 맥주잔에 가득 따른 대선 소주를 원샷했다. 그것이 버튼이라도 된 모양인지 갑자기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현지씨는 그때 알았다. 문제는 해결책 대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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