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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도 Apr 26. 2024

#7 알고 싶지 않은 그.사.세

소설 연재

현지씨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알아서 무엇하리? 달라지는 게 있나? 인간이 평생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면서 살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좋은 일로 보답도 하고 그러다 어느 정도 중화되면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현지씨는 그들의 세계를 궁금해해도 될 것만 같았다. 


5년 전이었다. 김 과장과 은아 선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안녕하세요. 마케팅팀에서 부서이동했습니다. 곽은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은아 선배는 마케팅팀에서 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내에서 전직을 한 드물지만 종종 있는 케이스였다. 김과장은 힐끗이라도 은아 선배가 인사하는 쪽에 눈길 조차 두지 않고 “네”라고 짧게 답변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이미 아는 얼굴이었기도 하고 기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자부심에 그녀의 전직을 달갑지 않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아 선배와 김 과장은 몇 차례 미팅을 진행하며 안면을 튼 사이였다. 


김 과장은 그 회의에서 은아 선배를 보고 속으로는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단순한 외모에 대한 호감이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되기에는 별 다른 건덕지가 없었다. 예뻐서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쉬웠던 혈기왕성했던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자신이 꽤 성숙한 어른 남성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어느 모임에 가든 첫인사만으로도 뭇 남성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은아 선배는 김 과장의 ‘노룩’ 인사가 익숙지 않았다. 기자라는 직함을 서류, 면접, 필기, 합숙 등 고단한 과정 없이 갈취한 무임승차형 인간으로 여기며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게 그저 진부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나도 학벌로는 당신에게 꿀리지 않거든. 보여줄게.’하고 악바리 근성이 발동되었을 뿐이었다. 


은아 선배는 팀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광고주의 요구와 독자들의 기호를 충족하는 적절한 네이티브 애드 기사를 쓰는 것이 천직인 듯 척척 해냈다. 마케팅 업무를 3년 동안 담당한 것이 기자로서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김 과장은 기자로서 광고나 쓰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회부 기자 동료들과 만나면 어쩐지 주눅이 들기도 했다. 진짜 기자라면 역시 청와대나 국회에서 상주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며 여러 차례 이직을 알아보기도 했다. 은아 선배가 네이티브 애드팀에 합류한 후로는 다소 분위기가 변해가고 있었다. 


“이번에 애드팀에서 글로벌 광고주들과 재계약을 성사시켜서 매출 세 배 이상 뛰었다며? 애드팀 아니면 기자들이 어디 월급이나 제대로 받겠냐고. 축하해, 김 과장.” 


광고와 기사 그 사이 어딘가쯤의 애매함이 비로소 매출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 과장이 대각선으로 1m 거리에 있는 은아 선배를 쳐다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매일 9시간 은아 선배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부터 퇴근 후에도 점차 그녀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게 고작 그런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닐 테지만 그러한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고 부르기에도 뭣했다. 은아 선배의 완벽한 왼쪽 얼굴과 길고 부드러운 목 선 아래로 보이는 딱 붙는 캐시미어 니트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블랙 레이스 브래지어에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긴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정이겠지,라는 마음으로 그녀를 떨쳐버리려고 한지도 한 달이 지나갔다. 섹스를 안 한 지 오래되었나 싶어 10년 사귄 여자친구 미정과 다시금 처음처럼 뜨거운 잠자리를 갖기도 했다. 사정을 할 때마다 은아 선배의 왼쪽 얼굴과 손바닥으로 움켜쥐면 꽉 찰 것 같은 딱 알맞은 사이즈의 봉긋한 가슴 또한 떠올렸다. 


미정이 그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미룬다면 헤어지는 게 맞다고 이별을 고하려는 차에 남자친구가 그녀를 원했다. 마치 처음 사랑할 때처럼 따듯하고 다정해서 미정은 김 과장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두었다. 거의 3개월 만에 함께 몸을 섞는 날, 그녀는 피임약을 끊은 지도 그쯤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까먹은 거라고, 진짜로 잊었던 거라고 자기 자신조차도 속을 정도로 세뇌하고 있었다.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뿐이었다. 남자를 사랑하는 것.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은 것. 


미정과 김 과장은 오랜만에 매일같이 잠을 같이 잤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한 달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하루에 많으면 두 번 겨우 주고받는 문자에는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는 택배문자 같은 알림만이 존재했다. 그렇다고해서 김 과장은 미정에게 헤어지자고 할 수도 없었다. 헤어진다고 은아 선배와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느낌만으로 결혼에 적합한 순진하고 헌신적인 착한 여자를 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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