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퇴사를 곁들인_슬픔 편(상)
나는 꿈이 많은 어린이였다. 미래의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 나는 내가 세상에 빛나는 무언가를 만들어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
어릴 때도 스스로 내가 엄청 명석하다거나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공부든 놀이든 목표에 몰입하여 곧잘 달성해 내는 아이였고, 그 과정과 결과를 즐기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힘껏 노력하면 뭐든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렇게 해내는 사람이 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반짝였다고 기억한다.
다만 나는 기본적으로 공정하고 선량한 사회를 전제했다. 인간 사회에서 야기되는 불온한 것들(약육강식, 불평등, 편견 등)이 있더라도, 대부분의 구성원이 그것을 극복하고 좀 더 아름다운 사회로 발전해 가는데 합의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었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믿음은 매일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며 깨졌다.
우울은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회사 생활은 내게 반짝이는 눈을 앗아갔다. 그게 내게 겪은 ‘일의 슬픔’이었다.
첫인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정보이면서 관계의 출발점이다. 잘못 굳어진 첫인상은 서로에게 오해와 불신을 생산한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은 참으로 무례했고 그 속에서 나는 도무지 무력했다. 그래서 수많은 좋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직장생활 10년 내내 사회에 대한 불안과 불신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회사는 3개월 정규직 채용연계형 인턴을 뽑는다고 채용공고를 냈다. 3개월이 지난 후 회사는 나를 포함한 합격자들에게 1년 계약직 후 최종 결정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당시 집안 사정 상 소녀가장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던 나는 다른 직장을 구하는 리스크를 감수할 여력이 없었다.
인간이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때, 그 알량한 권력을 얼마나 악랄하게 휘두르는지를 나는 그 1년의 평가기간 동안 경험할 수 있었다. 외모, 능력, 학벌 나아가 아버지의 직업까지 나의 모든 것이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역량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무리한 업무를 주고도 흔쾌히 응하지 않으면 부정적 평가를 주겠다는 협박 같은 압박은 흔한 일이었다. 내 반응을 실험하듯 은근한 성희롱을 하고, 입사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비매너 행동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사회란 게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생각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서, 내 경험이 부족해서 사회의 무례함이 이토록 놀라운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그 상황들을 불편해하면서도 불쾌하거나 부당하다는 생각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는 취업이 절실해서 내가 느끼는 불편을 그 상사들에게 들켜 미움받지 않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성희롱과 비매너를 일삼던 O이사를 한 여자 차장님이 ‘매너 좋고, 훌륭한 성품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 사람이 본디 역겨운 사람이라 그 본성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을 따져가며, 내가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절대적 약자’ 신분이었기에 추악한 본성을 마음껏 내보였던 것이다.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회사에서 나의 위치가 공고해질수록 O이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는데, 그게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아직도 그 무례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을 느낀다. 첫 사회에서 나는 약자였기에 착취당했고 그 부당함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했다. 부당함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그 상황을 인내하는 내가 비참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무지’를 선택한 것 같다. 그 순종이 나를 향하는 폭력을 더 강화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심, 언제든 다시 약자가 되면 그러한 폭력에 노출될 거라는 생각 속에서 매일을 살아갔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나는 회사생활 내내 매해 다이어리 첫 장에 이 문구를 꾹꾹 눌러썼다. 매해, 매일 이 믿음이 절실했다. 현실이 치사하고 부당하더라도 내 안에 빛을 다듬다 보면 언젠가는 공정한 평가를 받겠지, 내게도 빛나는 날이 오겠지 하는 믿음 말이다.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도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교육받았다. 직장생활에 들어선 순간 나는 이 사회에서는 나의 성별이 내가 평생 가져갈 약점임을 알 수 있었다.
남초 사회에서 여자 구성원은 분홍색 얼룩말처럼 조심스럽고 신기하면서도 위화감을 일으키는 존재인 듯하다. 조심스러운 나머지 그들이 불편을 느껴 나를 배제하지 않도록 나는 열심히 눈치를 챙겼다. 분위기에 따라 상사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명랑한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고,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상명하복의 꿋꿋한 머슴 역할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담배를 피우고, 욕지거리를 해도 맘 편한, 술을 마시며 음담패설을 나눠도 흠이 될 우려가 없는 후배가 되기는 어려웠다.
연차가 쌓일수록 필요한 역량은 객관적인 것보다 남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에 은근슬쩍 스며드는 것이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미팅과 영업 자리에서 곧잘 배제되었고, 사무실의 꽃 역할을 하며 묵묵히 일 잘하는 직원 신분에 만족하기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남녀가 평등하며, 똑같이 성취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내가 어느 수준에 만족하고 눌러앉는 것에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내가 덜 노력했거나 환경이나 타인에게서 부당한 것을 강요받는 것으로 해석되었는데, 내겐 두 쪽 다 받아들이기에 부단히 힘이 드는 것이었다.
사회의 구조도 요상했다. 같은 연차에도 낮은 연봉을 받는 것이 당연했고, 더 까다로운 평가와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내 입장에서는 2번이나 승진이 늦어졌음에도 ‘8*년생 어린 여자를 과장으로 승진시킨 전례가 없다.’라는 전사적 의문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나보다 어리고, 연차도 3년이나 낮은 남자후배는 6개월 뒤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으며 같은 직급으로 승진했다. 그러한 현실에 반발하려면 ‘이래서 여자는 안돼.’라는, 내가 속한 성별 전체의 평판을 위협할 용기가 필요했다.
매일 스스로 빛나면 된다고 다짐했지만 불공정한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나는 조금씩 좌절과 분노를 쌓아갔다. 불공정을 토로하는 내게 어떤 사람은 “사회는 원래 공정하지 않아. 너라고 뭐가 특별해서 언제나 공정한 대가를 기대하는 거지? 더 노력하고 능력 있어도 너만큼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하고 일침을 날렸다. 충분히 맞는 말이지만 나는 서러웠다. 나보다 힘든 사람을 위안 삼으며, 내게 닥친 불공정을 견뎌야 마땅했던 걸까?
다음 편에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