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
칠순이 훌쩍 넘은 부모님과 현 시점으로 21개월이 된 아이와 불평많은 남편을 케어해야 하는 워킹맘은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는 흡사 회사에서 연세드신 부장님과 철없는 mz 신입사원과 매일 퇴사를 외치는 동료를 감당하는 것과 같다.
“딸, 몸은 좀 어떠니. 혹시 생수좀 시켜줄 수 있니? 아빠가 돈은 보내줄게.”
아버지에게 문자가 왔다. 칠순이 훌쩍 넘은 부모님은 당연히 인터넷 쇼핑같은 것을 하실 줄을 모른다. 키오스크는 물론이다. 모든 것을 모바일로,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요즘 시대는 문자 하나 보내는 것도 한참 걸리는 부모님들이 살아가기 너무 힘든 시대다. 이 부모님을 케어하는 것 또한 워킹맘의 업무 중 하나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모든 것에 엄마 손길이 닿아야 하는 아이와 불평많은 남편. 이 모두의 안위를 담당하는 워킹맘은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내 일 하며 아이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부모님 온라인 쇼핑도 해드려야 하고(이와중에 최저가 검색은 필수다) 남편의 불만도 받아줘야 하고. 회사는 또 어떤가. 연세드신 부장님과 힘든 일을 상담하는 동료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mz 후배도 챙겨야 한다. 어찌보면 비슷한 구성원들이니 묘한 기시감이 든다. 직장에서는 직장에서대로, 집에서는 집에서대로 내 몸은 하나인데 나를 찾는 곳이 많다는 것은 변함없는 현실이다. 가끔은 모두에게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외치고 싶다.
그런데 아이가 잘 크고,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남편이 늘어져 기분좋게 쉬고 있다면 —비록 나만 지쳐 있다 해도—그건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부장님이 만족하시고, 동료는 다음날 멀쩡한 얼굴로 출근하고, 후배는 밥사달라고 조른다면, 역시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만 빼고 괜찮다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워킹맘의 현실이자, 리더십의 본질이다.
워킹맘은 회사와 가정, 두 개의 조직을 동시에 운영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연세 많은 부장님, 매일 퇴사하겠다는 동료, 그리고 예측불가한 MZ세대 신입사원을 상대해야 하고, 집에서는 칠순이 넘은 부모님, 감정기복이 잦은 배우자, 그리고 돌발 행동이 일상인 아이를 돌본다. 구조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모두가 ‘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계의 조직이라는 점이다. 결국 워킹맘이 겪는 피로의 상당 부분은 감정노동에서 온다. 하지만 이 감정노동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관리자’로 성장한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기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가 잘 돌아가게 만드는 균형감각’을 기르는 것이다.
상사는 존중받기를, 동료는 공감받기를, 신입은 인정받기를 원한다. 아이에게는 관심이, 부모님에게는 안정감이, 남편에게는 이해가 필요하다. 결국 이 모든 욕구를 파악하고 조율하는 사람은 중간관리자형 리더다.
워킹맘이 이 역할을 감당하면서 잃지 말아야 할 건 바로 에너지 관리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오래된 베스트셀러를 기억하는가. 이 책은 남녀가 싸우는 이유가 단순히 ‘대화의 방식’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여자는 공감을 원하지만, 남자는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는 것이다. 늘 바쁜 워킹맘은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문제 해결자’로 훈련되어 있다.
부하직원이 “요즘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면 “그럼 이렇게 해 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남편이 “회사에서 이런 사람때문에 힘들어”라고 하면 “그럼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종종 역효과를 낸다. 상대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금쪽이에게 대하듯, 가끔은 문제 해결보다 감정의 통로를 먼저 여는 것이 필요하다.
남편이 “요즘 너무 피곤해”라고 말할 때 내가 더 피곤하다는 불만은 잠시 억누르고 “그래, 요즘 진짜 힘들겠네”라고 말해보자. 회사에서도 불평 많은 동료가 있을 때 즉각적인 개선책 대신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힘들었을 거야”라고 공감부터 던져보라. 인터넷 쇼핑을 하지 못해 쩔쩔매는 부모님께도, 바뀐 회사 인트라넷 기능을 찾지 못해 고생하시는 부장님께도 마찬가지다. ”아빠, 그거 너무 복잡하지.“, “힘드시죠? 이거 저도 너무 어려웠어요.” 라는 공감의 메시지를 먼저 전하자.
솔루션은 두 번째, 공감은 첫 번째. 워킹맘 리더십의 출발점은 이 단순한 순서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1. 에서 공감이 중요한 이유는, 가정이든 회사든 대부분의 문제는 ‘관계의 균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의 떼쓰기, 남편의 짜증, 동료의 불평—모두 관계의 온도가 떨어졌을 때 생긴다. 아이는 엄마와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가 아이만 신경쓴다고 생각한다. 동료는 내가 자기 일에 관심이 없다고 서운해한다. 내 마음은 누가 알아주나 속상해 하지 말고, 일단 그러려니 하자.
아이가 이유없이 떼를 써서 화가 날 때는 “안 돼! 하지마!” 하고 다그치기보다 “뭐가 속상해서 그래? 엄마한테 얘기해줄래?”라고 말해보자. 21개월에 접어든 우리 아기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이런 달래는 언어는 알아듣는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고 다독여주면 아이도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화를 내면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자기 마음을 몰라주었다고 생각하는 탓이리라.
남편이 퇴근 후 짜증을 낼 때 “당신도 힘들었지. 오늘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어보자. 회사에서도 갑자기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사나 동료에게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급발진 대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떨어져 기다려 주자. 어차피 업무적으로 부딪쳐야 하는 사람들은 조만간 이성을 찾기 마련이다. 문제는 다시 생기지만, 관계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이 어렵다. 워킹맘 리더십은 문제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기술이다.
워킹맘의 하루는 ‘누군가를 위해’로 시작해 ‘누군가 때문에’ 끝난다. 아침엔 아이를 위해, 낮엔 회사 사람들을 위해, 밤엔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은 하루 중 단 10분도 없다면 결국 마음이 지치고, 감정이 쌓이고, 어느 날 폭발한다. 하루 10분, 단 10분이라도 ‘나만의 리셋 타임’을 확보하자.
출근길 커피 한 잔, 잠들기 전 스트레칭, 혹은 샤워 후 음악 한 곡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그 시간만큼은 누군가를 위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 10분이 하루 전체의 리더십을 지탱한다. 내가 평온해야 시스템도 평온하다.
워킹맘의 삶은 중간관리자의 리더십 훈련장이자 인생학교다. 우리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누군가의 불만을 듣고, 요구를 조율하고, 시스템을 유지시킨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외롭고, 지치고, 인정받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돌아보면, 누군가의 하루가 내 덕분에 평온했다면 그건 이미 리더십의 결과물이다.
우리 모두는 내 삶의 CEO이자, 누군가의 리더이자 또 다른 조직의 중간관리자다. 아이가 웃고, 부모님이 평안하시고, 가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지금 이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만 조금 힘들다면, 어쩌면 그건 내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다.
워킹맘 리더십의 진정한 완성은 “모두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한 내면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