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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모든 것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by 데이지

왜 여성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가


2012년,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앤 마리 슬로터(Anne-Marie Slaughter)는 The Atlantic에 「Why Women Still Can’t Have It All」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했다. 당시 그녀는 국무부 정책기획실 최초의 여성 실장이었고, 프린스턴 대학 교수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성공한 여성’의 상징처럼 보였던 그녀는,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었다.”


그녀의 커리어는 빛났지만 집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방황했다. 아들은 엄마가 곁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려한 외교 무대와 완벽한 경력,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결국 어느 한쪽을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앞에 마주서게 된 것이다. 슬로터는 이를 개인의 무능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직장 문화, 돌봄 체계, 학교 제도 모두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킹맘들이 처한 상황은 슬로터가 묘사한 장벽보다 더 견고하다. 제도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장치가 마련돼 있다. 이전보다 훨씬 길어진 육아휴직, 육아기 단축근무, 어린이집 연장반, 아이돌봄서비스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작은 회사의 경우 인력 부족으로 휴직이나 단축근무를 쓰기는 어려워 퇴사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운이 좋아 이 모든 제도를 다 활용할 수 있다고 해도 직장과 가정 두 군데 모두 공백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나의 경우 회사의 자체적인 모성보호 휴직과 육아휴직을 합쳐 아이가 16개월이 되어서 복직했다. 어린이집까지 적응시킨 후였지만 막상 출근을 하자 아이의 저항과 오열은 엄청났다. 8시에 출근하는 나는 6시 반쯤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8시에 일어나던 아기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면서 새벽기상을 하기 시작했고 아이도 나도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에서는 내내 졸려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셨고, 내가 퇴근하며 하원을 시키면 내 목을 꼭 끌어안고 유모차도 타지 않으려 해 안은 채로 하원시키곤 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이나 추석연휴 후에 출근을 할 때면 울음의 강도는 더 심해진다.


이렇게까지 하고 출근을 하지만 회사는 회사대로 눈치가 보인다. 팀장님과 팀원들의 배려 덕분에 나는 2시간 단축근무를 하며 아이를 하원시키고 있다. 오후시간에는 혹시 정신없을 수 있는 나를 배려해 회의를 가급적 오전으로 잡아주는 팀원들에게 늘 고마워서 커피라도 한 번 더 돌리려 한다. 아이가 없는 직원들에게는 혹시 역차별로 보이지 않을까, 이미 아이가 큰 선배들에게는 ‘나 때는 없었던 제도’의 혜택을 받는 것이 불공평해 보이지 않을까 늘 신경이 쓰여 회사에 있는 동안은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


보통의 회사는 승진대상자가 된 상태에서 수 년이 지나면 우선 승진대상자에서 배제되곤 한다. 나는 임신을 알았던 해에 승진대상자였는데, 임밍아웃을 하며 너무도 당연하게 승진대상자에서 빠졌다. 육아휴직 중에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또 당연하게, 복직한 해에는 복직이라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의 성과를 다져보지만 내년에도 단축근무를 계속한다면 내년 역시 밀릴 것임을 안다.


그렇다고 매일 풀타임 근무를 한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일단 남들은 5시 퇴근하는데 3시 퇴근하는 것도 특혜라면 특혜로 보일 것이다. 어떤 팀에서는 단축근무를 사용할 거면 퇴사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라떼는’ 그런 거 없어도 애들이 잘 컸다는 것이다. 단축근무를 허락해 주신 팀장님께 감사하며 숨죽이고 일한다. 아이가 아파 갑자기 휴가를 사용하는 일도 피할 수 없고, 아침에 달라붙는 아이 때문에 간당간당하게 출근하는 일도 생긴다. 육아를 하느라 힘든 것은 내 사정이고,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변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내년 승진 시즌이 되면 우울해질 것을 알면서도 단축근무를 그만둘 수 없는 현실. 어쩔수 없는 초과근무로 하원이 늦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실. 역시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면 두 명 힘으로 꾸리던 생계가 타격을 입는 현실. 아이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부재라는 결핍을 감당해야 하고, 나는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현실. 그러나 회사는 개인의 육아까지 고려해 가며 고과를 줄 수는 없고, 아이는 엄마의 커리어를 생각해서 엄마를 덜 찾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워킹맘이 감당하고 해결해야 할 몫이다.


인정-수용-변화의 3단계 원칙


1.단계: 나의 불완전을 인정하기

모든 문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속상했던 것은 회사에서도 승진하고 싶고, 집에서도 살림을 완벽하게 해내면서,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잘 해낼 수 있는 슈퍼맘이 아니다. 다만 슈퍼맘이 되고자 노력하는 보통맘일 뿐. 다 잘하는 워킹맘에 대한 환상은 접어두자. 솔직히 내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고 집안일과 육아를 잘 한다는 보장도 없고, 아이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2.단계: 현실을 수용하기

인식한 현실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체념이 아니다. 회복과 향상의 전제 단계다. 나를 비판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주위에 차고 넘쳤다. 인사고과 시즌이 되면 더하다. 남편도 기분이 나쁘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적하고 폄하하기 바쁘다. 일이 불만족스러우면 더 배우고 성장할 기회가 있는 것이고, 아이가 밥을 안 먹는 것은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내 탓이 아니라 그저 그런 것이다. 죄책감은 내려놓고 남의 일 보듯 객관적인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자.


3단계: 자기주도 변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버리고, 내가 주도할 수 있는 변수만 생각해 보자. 이 중에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나서 ‘가성비’가 가장 좋은 변화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일과 삶의 우선순위도 정리가 된다. 모든 걸 다 잘할 수 없다면 중요한 것부터, 그리고 했을 때 노력 대비 성과가 가장 큰 방향으로 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일을 제때 잘 하는 것으로, 집에서는 잘 청소된 집보다 행복하게 밥먹으며 대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보자.

(사실 근본적인 변화를 논하려면 사회적, 제도적 뒷받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작성하는 터라 해당 내용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순수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결론 - 이 자체로 이미 성공이다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생각은 바꿀 수 있다. 성공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자. 육아와 일이라니! 전업맘들도 육아는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아이가 없는 직장인들도 힘들다고 매일 사표쓰겠다고 난리지 않은가. 이 어려운 걸 해내고 있는 나 자신, 칭찬한다. 앤 마리 슬로터처럼 이미 완벽해 보이는 여성조차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고 고백했다면, 일반적인 워킹맘들이 처한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워킹맘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있다. 저출산에 기여하고 국가경제와 가정경제에도 이바지하고 있는 워킹맘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자산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얘기해 주자.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나의 위로와 격려가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나는 잘 하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전히 장시간 근무와 야근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다.

· 자녀 양육을 이유로 휴직이나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눈치 보기’**를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 경력 단절은 곧 ‘무능력’으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 아빠의 육아휴직은 제도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 사용률은 여전히 낮다.

결국 한국의 많은 여성들은 ‘슈퍼맘’ 환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좌절하고, 경력을 포기하거나 줄이는 선택을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우수한 인재를 잃고, 여성 개인은 꿈을 접어야 한다.


✦ 적용 가능한 변화 과제

Slaughter의 문제의식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우리의 맥락에 맞춘 변화 과제는 다음과 같다.

1. 성공의 정의를 다양화하기

o 커리어 고속승진만이 성공이 아니다.

o 아이와 함께하는 삶, 파트타임·프로젝트 기반 커리어도 ‘정상적인 성공’으로 인정해야 한다.

2. 돌봄의 사회적 가치 인정하기

o 돌봄은 사적 희생이 아니라 사회적 기여다.

o 경력 단절 여성이 복귀할 때, 돌봄 경험을 역량으로 인정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3. 근무시간과 평가제도 혁신하기

o 야근·얼굴도장 대신 성과 중심 평가를 강화.

o 재택근무, 시차 출퇴근제를 공공부문에서 선도해 민간 확산


앤 마리 슬로터처럼 이미 사회적 성공을 거둔 여성조차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고 고백했다면, 일반적인 워킹맘들이 처한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다.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희생이 아니라, 문화·제도·남성의 역할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변화다.

워킹맘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보통의 여성들이다. 그들의 삶이 존중받고 지원받을 때, 비로소 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성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챕터 뒤에는, 한국의 구체적인 워킹맘 사례(예: 한성숙, 정혜신, 이수정, 최영아 등)를 인터뷰 형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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