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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바라보는 정직한 무게

더 길티

by 이동기

죄의 무게를 다룬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우리에게 ‘법’이 존재한다한들 이를 누가 완벽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결국 ‘법’의 심판이란 사람들이 정한 약속에 지나지 않을 뿐 신의 판단에 따른 완벽한 도덕적 심판은 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경우에 따라 무게를 달리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 영화는 정의로운 법의 세계를 다루고자 노력했지만 그 무게에 영화적 사실감을 더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어떤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판단이 나뉠지언정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흥미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다. 법이 가진 공명정대한 시각이 경우에 따라서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음을 현실적인 시각에서 조명한 영화, 안소니 월러 감독의 <더 길티>(2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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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남자의 시각을 전혀 다른 시선에서 그려내기 시작한다. 첫 번째 남자 나단(데본 샤와 분)은 유년 시절부터 범죄에 휘말려 우울한 시기를 보낸 청년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그가 작은 범죄로 6개월간 교도소 생활을 하고 출소하는 장면이다. 친구들이 그를 마중 나오지만 그의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들일 뿐이다. 훔친 자동차로 그를 마중 나온 친구들은 막 출소한 그에게 아무런 고지 없이 또 한 번 절도를 하자고 제안한다. 가까스로 그들의 유혹에서 벗어났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가파르기만 한다. 교도소 생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 나단은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사업을 하고자 하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다가 비자 발급을 하기 위해 출생증명서를 떼어보고는 본인의 아버지가 자신이 알던 이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혼란에 빠지면서 새 아버지를 찾는다.


한편 영화가 비추는 또 다른 주인공은 유능한 변호사 크레인(빌 풀만 분)이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직업이지만 왠지 그의 화려한 언변과 행동은 정의보다도 돈의 무게에 좀 더 갇혀있는 듯하다. 정의를 판단하기 이전에 돈과 명예를 우선시하고 사랑을 나누기 이전에 사람을 가려가며 손을 내민다. 그런 그가 한 순간의 실수로 죄를 저지르게 된 건 단순한 실수라고만 볼 수는 없다. 안소니 월러 감독은 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을 교묘하게 마주치도록 극의 서사를 풀어놓았다. 그 가운데 소피(가브리엘 앤워 분)를 집어넣어 두 사람에게 혼란을 부여한 건 단순한 연출 장치라고 보기엔 서사를 풀어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장면이다. 결국에 그 둘이 만나 정의를 겨루게 됨은 그 자체만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볼만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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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도 좋고 인간쓰레기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는 벌을 받게 될 거라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크레인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앞으로 닥쳐올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자신을 두고 악마 같은 위선자라고 하는 말이나 어려울 때 마다 자신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연방판사로 임명된 후 아내 나탈리(조앤 웨일리 분)에게 저 위에서 우리의 운명을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결국엔 마지막 장면의 반전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드는 사전 포석이다. 아내는 물론 그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대답 자체에 묻어난다. 소피의 비극적인 운명은 바로 그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취업한 지 일 주일 만에 강간을 당하고 직장까지 잃게 만들고 새로운 충고랍시고 고작 새 출발을 하라고 권했을 뿐인 그녀의 힘든 상황은 그 운명을 새롭게 이끌어주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 굴레 안으로 밀어 넣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단과 크레인의 첫 만남은 조금은 인위적인 부분이 강했다. 하지만 어색하다기보다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거기에 강도들로부터 크레인을 구해내는 나단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그 상황에 침착성을 잃지 않는 크레인의 모습과 자신을 구한 이유를 묻자 쉽게 자신이 친아들임을 밝히지 못한 나단의 모습도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다. 사람은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울 수 있다며 자신의 친아버지를 경계하라는 타냐(안젤라 페더스톤 분)의 충고 또한 앞으로 다가올 사건에 대한 앞선 복선이 됐다. 이처럼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관객들의 입장에서 그 충격을 완화시켜줄 틈을 조금씩 제공하는데, 이러한 사전적 움직임은 이야기를 풀어냄에 있어 나쁘지 않게 다가온다. 인물 구도에서 발생하는 가벼운 긴장감이 장점인 스토리에서 강한 반전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을 심하게 흔드는 게 반드시 좋은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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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반적으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스토리 라인을 세세하게 다듬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야기 전개 속도를 적절히 밀고 당김으로 나름의 긴장감을 연출하려고 애쓴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크레인의 살인교사 제안에 나단이 혼란에 빠지고 이를 친구들과 논의하다가 그녀의 사진과 이름, 주소가 적힌 봉투를 하수구에 집어넣는 장면도 이에 해당한다. 이야기를 정직하게만 끌고 가지 않고 약간의 여지를 만들어 긴장감을 줬다가 놓았다가 하는 부분은 이야기에 흥미까지 함께 부여시키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크레인이 신문을 뒤적이는 모습과 소피가 신문을 뒤적이는 모습을 이어붙인 것도 재미난 연출이다. 똑같은 방향으로 신문을 펼치고 있지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신문을 읽어 나가고 있음은 중간에 놓인 나단의 입장을 더욱 부각시키며 세 사람 사이의 재미난 상황을 엮어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세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어떤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제대로 된 결말로 이어질지 궁금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안소니 월러 감독은 이처럼 여러 상이한 이야기들을 절묘하게 배치해 새롭고 흥미로운 하나의 스토리를 제대로 만들어냈다. 아픈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크레인의 충고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했어야 했다. 결국 영화가 만들어가는 제대로 된 결말과 눈에 익은 반전은 크레인 자신에서부터 시작됐음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결말이 관객들이 기대했던 스토리인지 아닌지는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2000년 제작된 영화의 시대적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익숙한 권선징악적 결말을 지양하고 새로운 신선한 결말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이다. 거기에 처음부터 줄곧 이어진 나단과 크레인 사이의 부자지간으로 얽힌 연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면 마지막을 장식할 당연한 반전 결말과 연결되어 재미있는 구성을 끄집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무죄와 유죄를 결정짓는 무거운 시선에 주목하기보다 사전에 정해놓은 정답을 시종일관 외쳐온 모든 상황들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전했던 영화, <더 길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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