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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pr 21. 2021

<세크리터리> BDSM이란 무엇인가

성적 성향이 만드는 사랑과 구원

특별한 성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들이 일반인들과 차별된다는 것을 안다. 여러 페티시즘 중에 BDSM성향(묶고 지배하고 가학적인, 혹은 묶이고 지배당하고 피가학적인 것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향자 혹은 에세머(SMer)라 칭하고, 성적인 탐구를 전혀 하지 않고 일반적이라 부르는 체위와 섹스만 하는 사람을 바닐라(Vanilla)라 부르며 서로 섞이길 거부한다. 바닐라와 에세머는 성향이 안 맞기도 하지만, 바닐라가 에세머인 척해서 일어나는 사건과 범죄들도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런 바닐라를 변태 바닐라라 부른다.


에세머에게 성적 성향은 없어선 안될,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BDSM이 가지고 있는 복장, 규율, 플레이의 특수성 때문에 미디어에서는 종종 성적인 여흥이나 코믹한 소재로 이용되어왔다. BDSM을 다룬 근래 대표적인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그런 식의 BDSM 겉핥기 영화 중 하나다. 그 영화는 그저 마조히즘 성향자의 로망이 잔뜩 담긴 포르노에 불과하다. 최근 나온 <모럴 센스>역시, 주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코믹하게만 다뤄져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세크리터리 (Secretary, 2002)>는, 정말 완벽할 정도로 BDSM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수준 높은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분류가 로맨틱 코미디지만, 그런 식으로 가볍게 접근할 수만은 없다. 감독은 스티븐 셰인버그인데, <세크리터리>가 두 번째 장편영화다.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선댄스 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 등 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매기 질렌할도 스타덤에 올랐다. 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의 변태 연기로 유명한 제임스 스페이더가 다시 보여주는 그 섬세한 변태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스티븐 셰인버그의 다른 장편영화들도 뭔가 범상치가 않다. 그다음 영화 <Fur>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괴짜를 찍는 사진가'로 유명한 '다이안 아버스'를 기리는 영화다. 하지만 그의 삶을 전기로 다룬다기보다, 어떻게 장애인, 난쟁이, 나체주의자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진에 담게 되었는지 그 마음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아마 스티븐 셰인버그 감독은, 남들과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세크리터리>는 BDSM을 기존의 영화에서 보여주던 모습이 아닌, 특별하면서도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청소년 관람불가에 BDSM을 다룬다고 해 놓고, 일반 사람들이 SM 하면 떠올리는 가죽옷에 가면을 쓰고 채찍을 휘두르는 자극적인 가학 장면이나 섹스씬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노출장면도 마지막에 딱 한번, 그리고 여주인공의 자위행위가 몇 번 나올 뿐이다.


이 영화에선 자해와 치유가 BDSM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성폭력처럼 보이는 가학적, 피가학적 행동이 왜 사랑인지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섹스나 사랑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BDSM과 사랑의 모습에 이해를 못 하거나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들을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어'라기 보단, 마치 성소수자를 대하듯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포용하며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BDSM을 하는 사람들은, 보이진 않지만 어디에나 있다.



BDSM(Bondage / Dominance, Discipline / Submission, Sadism / Masochism)

성적 성향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그중에서 BDSM은 가장 육체적 정서적으로 파괴적인 곳까지 몰아갈 수 있는 장르다. 그렇기에 자극적이고, 미디어에서는 로맨스부터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BDSM은 그렇게 파괴력이 강한 만큼, 현대에는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며 발전하고 정착해왔다. 비록 그 시작은 오래 전 범죄자인 사드 후작과, 그 뒤를 이은 자허마조흐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사디즘(Sadism)의 어원인 사드 후작은, 자신의 가학적 성향을 작품으로 남기고 삶도 그런 식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쓴 가학 성향의 괴작인 <소돔의 120일>은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도 괴작 수준인데 고어의 끝판왕이라는 별명답게 지금도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들이 난무한다. 이런 사드 후작은 자신의 가학 성향을 주체하지 못해 감옥에도 많이 들락거렸다.


마조히즘(Masochism)의 어원인 자허마조흐는, 반대로 피학 - 혹은 서브(Submission, 굴복)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냈다. 실제로도 파트너와 계약을 맺고 서브로써 생활을 했지만, 마조 성향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드 후작과 달리 잘 지냈다고 한다. 이미 사드 후작보다 100년 후라 그런 성향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이기도 하고. 그 영향으로 남자 노예를 가진 여성주인(펨돔)은 아직도 모피를 입고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적 성향이라는 것은 대부분 타고난다. 어떤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그것이 어릴 적 어떤 특수한 환경과 경험 - 학대, 추행, 강간, 동경, 특정 환경에의 노출 등 - 이 성적 성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특정 성적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 둘을 연결시키기에는, 원래 갖고 있다가 특수한 환경과 경험에 노출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런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SM 전문 포르노 배우이자  에세머로 커밍아웃한 배우 로잘린 영은, 아마존에 등록한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나는 어릴 적 학대 경험이 없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나의 성향을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간과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마치 BDSM성향자가 어릴 적 그런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마치 동성애가 동성끼리의 강간 경험을 하고 나서 생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건 성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사회적 가해를 하는 것이다.


그럼 BDSM의 성향은 어떤 게 있을까? 뒤에 나올 영화 이야기를 할 때 필요할 테니, 주요 성향과 관계만 간단히 알아보자. 이 성향에 의한 관계들은 모두 서로 좋아서 하는 '합의된 관계'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제대로 관계를 맺으려면 상해에 관한 계약서를 쓰고 한다.




사디스트 / 마조히스트 (Sadist / Masochist) :

육체적인 가학과 피학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향이다. 원래 모든 관계가 처음에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에서 나눠졌기 때문에 이 전체 장르를 SM이라 불렀지만, 나중에 본디지와 도미넌스 측면이 강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다 같이 합쳐 BDSM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일반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 중 하나인데, 보통은 사디스트도 아무나 때린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고 마조히스트도 아무에게나 맞는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다. 밑의 다른 성향들도 그렇지만, 둘 사이에 깊은 신뢰와 케미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도미넌스 / 서브미션 (Dominance / Submission) :

누군가를 지배하고 지배받고 싶어 하는 성향이다. 또, 이런 성향을 간단히 줄여 '돔', '섭'이라고 한다. BDSM초창기에는 이 성향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성향자들의 계약관계를 줄여서 D/S (디엣) 관계라고 했다. 이것이 흔히 미디어에 나오는 BDSM의 모습이다. 10년 전만 해도 새디와 마조를 성향, 돔과 섭을 포지션이라 부르고 나누었으나 현재는 성향과 포지션이 뒤섞이고 더 세분화되었다.


마스터-미스트레스 / 슬레이브 (Master-Mistress/ Slave) :

돔, 섭 포지션에서 더욱 노련해지고 깊어진 성향을 말한다. 마스터는 슬레이브에게 존경받고, 슬레이브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한다. 한국에선 흔히 돔, 섭에서도 같이 서로를 '주인님''노예'로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에선 너도 나도 마스터니 미스트레스니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냥 멋있어서 이름 붙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사실 서로가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쉽게 할 수 없는 성향이다.


스팽커 / 스팽키 (Spanker / Spankee) :

특별히 엉덩이만 때리고 맞는 것에 성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성향에서도 훈육이나 조교 등을 위해서, 혹은 사디와 마조 성향 때문에 때리고 맞긴 하지만 스팽커/스팽키(줄여서 '키', '커'라 부른다)는 엉덩이에 국한되어있다. 이 성향만 있는 사람은 아예 다른 부위의 체벌이나, 지배관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분류가 되었다.


디그레이더 / 디그레이디 (Degrader / Degradee) :

정신적인 가학과 피학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향이다. 말이나 행동으로 모욕을 주거나 수치심을 준다. 이 부분은 그저 욕을 하고 받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굉장히 섬세한 케미가 있어야 좋다. 그래서 흔히 생각하는 SM만 아는 사람들이 이 장르를 접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둘만 아는 수치심에 대한 행동이 오가기 때문이다.


헌터 / 프레이 (Hunter / Prey) :

상대를 육체적으로 제압해, 강압적인 플레이와 섹스를 하는 관계. 겉모습으로 보면 강간과 비슷하다. 예전엔 강간 플레이(Rape play)로 불렸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요새는 헌터플로 자주 불린다. 지배하는 관계와 크게 상관없는 성향이다. 아니 오히려, 지배하고 지배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성향이라고 하면, '서로 아무에게나 강간하거나 강간당하는 걸 좋아하는 거 아니냐'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강압적인 섹스에서 감정을 더 세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자신과 합의되지 않은 사람과 하거나 당하게 되면 서로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브랫테이머 / 브랫 (Brat tamer / Brat) :

브랫은 말괄량이라는 뜻으로, 말을 듣지 않고 행동하는 걸 말한다. 예전에는 이런 성향을 아예 서브로 취급하지 않거나, 프레이의 일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심리적 측면 프레이와 다른 부분이 많아 따로 분류하게 되었다. 브랫 테이머는 브랫을 다루는 것에 흥분을 느낀다. 얼핏 보면 둘의 관계를 예측하기 힘들고, 심지어 너무 심한 장난을 쳐서 저래도 되나 싶은 측면도 있다. 헌터/프레이와 닮아 보이기도 하지만, 보통 프레이는 헌터를 무서워하며 반항하고 도망치는 타입이고, 브랫은 무서워하지 않고 심지어 놀리고 대들기까지 한다.


리거 (로프 탑) / 로프 버니 (로프 바텀) (Rigger, Rope top / Rope bunny, Rope bottom) :

밧줄, 로프 등으로 묶어 결박하고 결박받는 데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향이다. SM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밧줄로 몸을 구속하는 본디지(Bondage)인데, 본래 서양에서는 단순히 사슬이나 수갑 등으로 몸을 구속하는데 쓰였었다면, 리거와 로프 버니 성향으로 대표되는 로프 본디지는 일본에서 시작,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는 형벌과 고문에, 밧줄로 죄인을 묶어 길거리를 다니게 하고 매다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SM 하면 생각나는 '귀갑 묶기'같은 것이 일본 영화에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런 로프 본디지는 다른 플레이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해부학에 대한 전문지식도 있어야 하며 예술성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다른 성향 없이 묶고 묶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성향자들이 늘면서, 따로 분류가 되었다.




BDSM이 처음 나올 때는 인권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시대였지만, 이제는 페미니즘과 같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더해지면서 플레이도 더 안전하고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어떻게 때리고 맞고, 혼내고 욕하는 것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까. 불경한 것을 넘어서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SM은 퇴폐적이고 부정한 성행위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 영화가 조금 더 자신들에게 솔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면 좋겠다.




성향을 알기 전의 할로웨이

리 할로웨이(매기 질렌할)는 본인의 성적 성향을 아직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자아감, 존재성을 위해 자해를 하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 갔다 나오게 된다. 할로웨이는 중학교부터 자해를 해왔는데, 자해를 위한 도구들도 아주 예쁘게 모아놨다. 그녀의 방은 예쁘고 섬세하다. 그리고 보라색이 가득하다. 영화에서 할로웨이의 보라색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갇혀있다는 것, 아직 정서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할로웨이 자신을 나타낸다. 그녀의 집은 큰 수영장이 있는 꽤 잘 사는 집이다. 하지만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다. 딸을 좋아하는 듯 보이지만 항상 취해있고, 그것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한다. 그녀는 마음속에 빈 구멍이 생긴 것 같을 때, 자해를 시도한다.


자해를 하는 데는 사람마다 이유가 다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채워줄 것들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알기 때문에 크게 상처를 내진 않지만, 자해할 때 자신의 빈 곳이 채워짐을 느낀다. 할로웨이의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로 SM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성향인지 알지 못한 채 산다면, 성격이 괴팍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폭력을 일으킬 수도 있다. 특히 마조히스트인 경우, 슬프게도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인 상대를 찾아 연애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일반인이 볼 때는, 그럼 그건 서로 좋아하며 하는 거니까 괜찮은 게 아니냐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SM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폭력 뒤에 이어지는 돌봄으로 인해, 그 상처가 치유되고 현실로 돌아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SM용어로 '애프터 케어'라고 한다.


애프터 케어(After Care)란, 플레이를 한 이후에 탑이 바텀을 보듬어주고 보호해주고 돌봐주는 것을 말한다. 사실 SM은 육체적인 피해보다 정서적인 피해가 더 크다. 그래서 애프터 케어를 해주지 않는다면, 바텀은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는 섭 드롭(Sub drop), 혹은 텀 드롭(Bottom Drop)이 오게 된다. 플레이할 때의 감정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플레이가 끝난 후에도 우울해지고, 실제 성폭력을 당한 것처럼 마음이 힘들어진다. 탑도 마찬가지다. 탑도 범죄자가 아닌 한, 자신이 케어를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어 돔 드롭(Dom Drop)/탑 드롭(Top Drop)이 오게 된다. 일반적인 섹스에서는 후희가 서로의 느낌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섹스 토크 등을 통해 서로 더 돈독해진다면, 이 애프터 케어야 말로 현대 SM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고, 섹스의 유흥으로 SM을 즐기는 일반인과 에세머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즉, 자신의 성적 성향이 뭔지도 모른 채 감정과 정서를 내뿜기만 한다면, 주변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계속해서 상처를 주게 된다. 할로웨이는 자신의 성향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자해들이 아버지와 관련된 스트레스 장면에서 등장하는 걸 보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며 또 싫어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성향을 알지만 깊은 SM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그레이

할로웨이는 변호사인 에드워드 그레이(제임스 스페이더)의 구인광고를 보고 그에게 찾아간다. 그녀는 여전히 보라색으로 몸을 감싼 옷을 입고 있고, 처음 찾아간 그 사무실의 집 번지수는 '2640'이다. 2640은 전화 자판에서 이으면 십자가를 그린다. 즉, 그 집이 할로웨이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에 비서실은 난장판이고, 울며 짐을 싸고 나가는 사람과 마주친다. 할로웨이는 당황하지만, 이때 할로웨이가 마주한 그레이는 아주 섬세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가 면접 질문을 하면서 사무실 한쪽의 장치를 작동시키자, 사무실 한가운데 식물을 키우는 작은 정원에 불이 켜지고 수증기가 내려온다.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이질적인 작은 정원은 창살이 있어 마치 감옥처럼 보이지만, 동그랗게 뚫려있어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 속은 풀과 습기가 가득해 굉장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보라색 꽃이 피어있다. 그건 그레이가 도미넌스의 성향을 가졌다는 걸 나타내고, 또한 대단히 섬세하며, 보라색을 입고 있는 할로웨이와 성향이 맞는다는 걸 보여준다. 아름다운 감옥에서 보호받아 피어난 보라색 꽃. 그녀는 비서에 합격한다.


그때 사무실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처음 그레이가 사진을 들고 마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인데, 그녀는 큰 목소리로 그레이를 부르며 찾는다. 그리고 전화받으랴, 그 여자를 상대하랴 고군분투하는 할로웨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한마디 한다.


"Submissive.(고분고분하군.)"


그녀가 할로웨이를 보고 "Submissive"라고 한 것은 사실 그냥 "고분고분하군"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녀의 성향이 BDSM에서 서브라는 걸 암시하는 말이다.


그레이는 그 여자가 오자 왜인지 모르지만 숨는다. 그레이는 BDSM을 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과 관계가 상대방과 깊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성향이나 행동을 보면 BDSM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상대를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안다. '주인님'으로써의 자질이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즐기는 관계가 그 단계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자들과 관계를 맺다가, 무책임하게 피하고 버렸던 것이다. 할로웨이는 자해를 하다 그레이에게 들키게 된다.


서브가 돔에게 의지하게 되는 과정

그때부터 그레이의 행동은 점점 이상해진다. 화를 내고, 또 칭찬하기도 하며 그녀를 들었다 놨다 하기 시작한다. 별거 아닌 장면 같고 그저 괴팍한 상사 같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점점 그녀가 그에게 종속되어가도록 훈육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다루던 어느 날, 그레이는 그녀와 조용히 면담을 하다가 자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중 하나다. 그레이와 할로웨이의 섬세한 연기들. 단순한 대답에 이어지는 표정 하나하나에 둘이 가지는 마음까지 다 보여준다. 그레이는 할로웨이에게 말한다.


"내면의 고통이 외면으로 올라오고, 내면 고통의 증거가 보여야만 내가 여기 있다는 확신이 드나요? 상처가 낫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요. 그렇죠?"
"... 어떤 면으론 그렇죠."

"리 씨, 뭔가 얘기할 게 있어요. 들을 준비됐나요?"

"네."

"당신은 앞으로 절대로 자해하면 안 돼요."


이 대화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우선 그레이는 할로웨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했다는 점이다. 할로웨이는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그레이의 말을 듣고 마음이 밖으로 끌어올려진 다음에, 그레이의 다음 말, "절대로 자해하면 안 된다"라는 확신에 찬 명령으로 마음이 안전한 곳에 매이고 치유되어버렸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게, 할로웨이가 가졌던 자해의 이유가 그레이가 다룰 수 있는 종류의 자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끌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모든 자해가 SM으로 치유되는 건 아니다.


살다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또, 심리학이나 철학 등을 공부해도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구 들쑤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더 잘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폭력일 뿐이다. 거기엔 해결책도, 애프터케어도 없다. 마음을 치료하려면, 그 마음을 꺼내놓기 전에 치유할 방법, 애프터케어할 방법을 마련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남의 상처는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BDSM은 단지 육체를 상처내고 치유하는 행위가 아니라, 영혼에 상처를 내고 치유하며 서로에게 깊이 물드는 과정이다.


그레이는 아주 능숙하고 진지하게 할로웨이의 마음을 꺼내고 자신의 명령 안에 넣어버렸다. 이제 할로웨이는 그 아픔과 스트레스를 자신이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멀리 있어도 그 명령을 들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방식은 종교적인 상담에서도 종종 쓰이는 방법이지만 그레이는 그걸 할로웨이를 치유하는데 썼다.


이제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레이와 할로웨이의 BDSM 플레이

그는 그녀가 쓴 편지의 오타에 화를 내고, 방으로 오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손을 책상에 대고 오타가 난 편지를 읽게 한다. 무언가 섹슈얼하면서도 굴욕적인 자세에 할로웨이는 머뭇거렸지만, 그대로 읽기 시작한다. 그레이는 틀린 글자마다 스팽(Spank:엉덩이 때리기)을 한다. 이 플레이는 스팽과 수치 플레이를 같이 한 셈이다. 자신이 틀린 편지를 읽게 하고 그거에 맞게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맞는다는 수치심, 또 엉덩이를 맞는 고통. 할로웨이는 이 행위가 그녀의 자해처럼, 내면의 고통이 자신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외면으로 끌어올려졌다. 그래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스팽이 끝날 때쯤, 그레이 역시 쾌감을 느끼며 그녀의 등 뒤로 스러지며 책상을 짚었는데, 그때 손가락 하나가 살짝 그녀의 손가락과 닿았다. 거기에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안심했다. 그레이가 등에 살짝 기댄 것과, 서로의 손가락 하나가 닿은 것이 바로 그녀에게 애프터 케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플레이와 애프터 케어는 아주 섬세한 감성을 가진 할로웨이와 그레이만의 것이다. 둘은 그 정도의 맞닿음으로도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또한 앞서 있었던 깊은 유대가 있어서 가능했다. 할로웨이는 그 손가락을 다시 살짝 겹치며,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표시를 한다. 플레이는 여기에서 끝난다. 할로웨이는 돌아와 스팽으로 멍든 엉덩이를 보며, 진정으로 치유됨을 느끼며 성적 흥분으로 이어진다. 이제 정말로 자해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할로웨이는 자신의 자해 도구를 다 버려버린다. 그리고, 보라색 옷에서 벗어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실제 사회적 관계가 있는 사람끼리의 BDSM플레이는 흔치 않다. 왜냐하면 둘의 관계가 실제로 고용주와 피고용주로써 돔과 섭의 관계와 비슷하며, 그레이는 할로웨이의 실수에 정말 화를 내고 월급을 깎거나 해고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절대적이며, 신뢰해야 하고 복종해야 한다. 단지 상황극을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오고 가는 사무실, 일하는 도중. 이건 실제상황이다. 그렇기에 더욱 쾌감을 느끼고, 할로웨이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그레이와 할로웨이는 여러 가지 플레이를 하며 즐긴다.


그 편지의 오타들이 둘을 이어주는 도구가 된다. 할로웨이의 오타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지고 혼나는 동안 할로웨이는 그 빨간 동그라미만 봐도 앞으로 있을 체벌에 흥분하게 된다. 책상에 있는 가득 놓인 빨간펜은 그와의 관계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 오타난 편지를 각종 본디지 도구를 차고 가져오게 하거나, 복도를 기어가게 하거나, 동물처럼 당근을 물고 안장을 차거나, 퇴근한 후에도 먹는 것에 제한을 주고 지키게 하는 등 아주 사소한 것들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플레이. 그 플레이를 통해 할로웨이는 그레이에게 마음으로 깊이 빠져들고,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그 사랑을 할로웨이가 자위하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할로웨이의 마음이 깊어지는 걸 눈치챈 그레이는 플레이를 그만둬버린다. 더 이상 관계가 깊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깨어난 에세머의 정체성, 이젠 돌아갈 수 없다

그녀는 그가 다시 자신에게 화를 내고, 훈육하고, 체벌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해보고, 그에게 엉덩이를 때리도록 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다 결국, 지렁이를 그레이의 편지에 넣는다. 그레이는 깔끔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편지 안에 있던 지렁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관계의 선을 넘어선 것이다. 반항의 상징이다. 여기서의 플레이는 브랫/브랫테이머의 그것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레이는 참지 못하고, 할로웨이를 부른다.


선을 넘어선 행동. 그것에 대한 체벌은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전까지와 다르게 스커트를 올리고 팬티를 내리게 했다. 조금 두려워하며 엉덩이를 내린 그녀에게, 그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뒤에서 그대로 자위를 하고, 그녀의 옷 위 등에다 사정을 한다. 이건 그녀가 엉덩이를 때려줄 거라는 예상과 선을 뛰어넘는 행위였고, 훨씬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할로웨이는 참지 못하고 회사 화장실에서 격렬한 자위를 한다. 그녀는 이제 SM 플레이가 있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둘의 관계가 단계를 넘어갔다 생각하고 자위하는 그녀를, 그레이는 해고한다. 더 이상은 자신의 선을 지킬 수 없음을 안 것이다. 여기에서 할로웨이는, 그녀 주변의 여자와 비서가 왜 그런 식으로 그를 떠났는지 알게 된다. 그레이는 젠틀한 척했지만, 실은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그레이도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들면 책임질 수 없어서 버리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할로웨이는 자신을 만족시킬 다른 에세머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다른 에세머들과는 세세한 성향이 맞지 않는다. 그레이와 할로웨이는 서로가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딱 일치했던 것이다. 정신이 없던 와중에 그녀는 어릴 적 친구인, 성적 성향이 없는 피터에게 청혼을 받고 모든 걸 포기하고 결혼 준비를 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그녀의 방. 그런데 그녀의 방은 이전의 보라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진지한 사랑에 빠지고, 마음속이 갇혀있던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할로웨이는 피터와 결혼식을 시작하려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반지를 빼고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그레이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마지막 명령, 그리고 최고의 애프터케어

그레이는 이렇게 SM을 계속하며 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어로 "24 hours a day, 7 days a week"라고 하는데, 이건 영어의 관용구로 '항상'이라는 뜻이지만 마스터/슬레이브의 대표적인 플레이인 '24/7'플레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플레이는 몇 시간 안에 시작되고 끝을 맺거나 하지만, '24/7'은 말 그대로 끝나지 않고 며칠, 몇 주 혹은 그 이상씩 계속되는 플레이를 말한다. 이것은 마스터와 슬레이브가 아니면 하기 힘들다. 즉, '나는 마스터가 될 수 없다. 항상 SM을 할 수는 없다. 내 생활, 내 일이 있고, SM은 그저 즐기는 것이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레이는 할로웨이에게 책상에 손을 붙이고 자신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손을 붙이고, 그레이는 나가버린다. 그녀에게 여러 시험을 던져준다. 조금이라도 손을 떼면 불합격시켜 헤어지려고. 그러나 그녀는 최선을 다해 명령을 지킨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된 건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레이는 피터에게 전화해 그녀의 가족들이 오도록 만든다. 그래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조금 유쾌하게 진행되는 이 부분은 마치 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 같다.


하지만 아버지만은 달랐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넌 신이 삶에 준 신성한 선물인 아이란다.

나한테서 왔지만 내가 아니지.

영혼과 몸은 네 것이고,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아버지만이 할로웨이를 이해해준 것이다.


그리고 3일 동안 온갖 사람들이 다 그 사무실 안에 모여들었고, 방송국에서 취재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플레이를 한 것이다. 사실 에세머들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플레이하는 자기의 모습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일이다. 그녀는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방송까지 타며 온 나라에 자신이 에세머인걸 공개해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그레이는 마음을 돌린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걸 잘 지켜준 대가로, 자신도 커밍아웃한 것이다.


지쳐 쓰러진 그녀에게 음료를 먹이고, 사무실 위층으로 데려간다. 그곳엔 욕조와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그녀를 씻겨주고, 마사지하며 케어해준다. 그 힘든 명령을 수행해낸 데에 대한 보상이다. 그리고 진짜 최고의 애프터케어는, 그가 지금까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사랑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잘 맞는 에세머가 결혼해, 평생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관계. 이 영화는 할로웨이가 정체성을 찾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돔이 마스터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기도 한 영화였다. 관계가 깊은 사이일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니까.




사랑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내가 이 사람과 사랑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틀렸거나 그 사람의 방식이 틀린 걸까? 서로 맞지 않는 만남은 서로에게 고통이 되고, 서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맞는다면, 다른 사람과는 단점이 되었던 나의 모습이 그 사람에겐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관계는 나 자신을 인정하도록 해 주고, 사랑하도록 해 준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온전한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BDSM은 그런 다양한 사랑과 관계의 방식 중 하나다. 그것이 사랑, 마음처럼 고귀한 것이 아니라 성적 성향이라 해서, 문란하고 더러운 것일까?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그게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 합의된 관계라면, 그리고 충분히 안전하게 즐길 환경이 마련된다면, 성적 성향은 무엇보다 관계를 돈독하고 깊게 만들어주며, 심지어 서로의 정신적 상처를 보듬어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들에겐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필요하다.


성적 성향은 사랑이 성사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나 자신을 알고, 나의 성적 성향을 알고, 그것을 현명하게 엮는 사람이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할로웨이는 화면-관객을 무심하게 쳐다본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들은 과연 어떤 사랑과 섹스를 하고 있는지.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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