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분홍색의 덩어리였다.
맛있어 보였다.
그것을 잡으려는 찰나, 그 덩어리는 마구 증식해서
잡으려던 손을 집어삼켰다.
그 덩어리에서는 손이 수십 개,
눈알이 수백 개가 생겨났다.
나는 힘겹게 손을 빼고 두려움에 머리를 잡았다.
그러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은 허공이었다.
그 덩어리는 나의 팔다리를 잡더니,
꼭두각시처럼 이리저리 마구 춤을 추게 만들었다.
머리가 없는 나를 지배하려 한다.
분홍색 파도가 친다.
물컹한 덩어리가 파도에 휩쓸려 손에 닿았다.
물컹한 그 덩어리의 감촉은 마치 두부 같다.
분홍색의 파도는 검은 허공을 떠돌다,
뭉쳐졌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나를 지배하려던 그 덩어리들은
모이고 모이고 모여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한다.
“… 영원한 꿈을 꾸리라.”
네? 무슨 말이죠?
덩어리는 나에게 슉 밀려왔다가,
나를 내려다보며 한마디씩 속삭인다.
“… 재호.”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며,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케이아스 교수, 구급대원으로 보이는 로봇, 구경하는 로봇….
“재호 씨…! 내 말 들려요?”
케이아스 교수의 목소리에 재호는 눈을 떴다. 팔을 움직여 상체를 일으켰다.
“네…. 아후…. 제가 쓰러졌었나 보네요.”
재호가 눈을 부비며 정신을 차리려 하자 구급대원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체크를 해 보겠습니다.”
구급대원은 재호의 몸에 이것저것 꽂아서 신호를 체크했다. 잠시 후, 케이아스와 재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는 괜찮습니다. 아마 갑작스러운 정신적 충격으로 외부와 연결이 끊긴 건데, 오히려 그 덕에 가소성 출력이 높아져서 바디와 연결성이 더 좋아졌어요. 아까보다 한결 가뿐하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케이아스는 구급대원에게 인사하고, 그들은 구경꾼들을 제치고 자리를 떴다. 재호는 머리를 만져 보았다. 머리는 잘 붙어 있었다. 재호는 일어나 보았다. 몸은 생각한 대로 잘 움직였다.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재호는 머리를 좌우로 털 듯 흔들었다.
“어우…. 그 얘길 듣고 충격이 컸나 봐요. 당시는 정말 끔찍했거든요. 정신을 잃은 동안 이상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이젠 괜찮아요. 머리도 몸이 가볍네요.”
케이아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입고 있던 코트를 추스르고,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재호의 사진을 보았다.
“휴…. 다행입니다. 재호 씨가 박물관에 이렇게 중요하게 나오는 이유는, 당시 남우석 박사가 살인죄로 잡혀가긴 했지만…. 남우석 박사가 재호 씨를 실험해서 남긴 데이터가 굉장히 중요했어요. 비록 남우석 박사의 연구 방향은 틀렸고 대부분은 과학적이지 않은 실험들이기도 해서 97%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 남겨진 3%의 데이터와 남박사의 수식, 아이디어들로 인해 ‘A.I.의 자의식 발현’에 대한 연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데이터에 주목했던 팀은 재호 씨 사건이 있고나서 30년 뒤의 휴머노이드 벤처기업이었던 ‘아라인’이었죠. 그 회사는 ‘살인자의 데이터를 기초로 한다’며 큰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몇 년 뒤 그들이 만든 A.I.가 자의식을 가졌다는 게 여러 테스트로 확인되면서 강인공지능, 인격체로써의 A.I.가 탄생했던 겁니다. 즉 당신은 여기 있는 모든 뉴먼의 시초이자 조상인 거예요. 재호 씨도 그 데이터를 토대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거고요.”
재호는 너무나 놀랐다. 이 놀라운 미래 세계, 아름답고 자연과 조화가 이뤄진 로봇, 아니 뉴먼의 세계. 그것을 만드는 시초가 자신이었다니. 자신은 세상에 해악만 끼치고, 쓸모도 없이 어두운 곳에서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다 죽어가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모두들 자신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거기서 어떤 뉴먼이 쓰러져 구급대원이 온 상황을 구경하던 뉴먼들은 그게 자신들의 조상 ‘양재호’라는 것을 대화를 통해 알아챘다. 그리고 곧 수군거리며 핸드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뉴먼들이 몰려오고 어디선가 탄성도 들려왔다. 재호는 멍한 기분이었다. 멋쩍게 손을 들어 보이자 ‘우와!’라며 커다란 환호가 박물관에 울려 퍼졌다. 양재호를 뉴먼으로 되살려냈다는 것은 기밀사항이었는데, 너무 일이 커진 것 같아 케이아스는 조급했다. 케이아스는 모여드는 그들을 제지하고, 밀치며 밖으로 나왔다. 뉴먼들이 따라왔다.
케이아스는 급히 택시를 불러 탔다. 재호는 연예인이 된 듯이 웃으며 손을 들어 화답해 주다가, 케이아스가 끌어당겨 넘어지듯 택시에 탔다. 택시는 급히 그 자리를 떴다. 기사는 없고 자율 주행하는 택시였다. 재호는 그저 멍하니 멀어져 가는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케이아스는 조금 한숨 돌리며 대답했다.
“새옹지마라고 하죠. ‘나쁜 것이 오면, 그 뒤에 더 좋은 것이 오기 마련이다.’ 재호 씨가 잘못 살지 않았다면, 좋은 날이 오기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언젠가 그날은 옵니다.”
“새옹지마…. 큭큭큭, 그거 기원전에 만들어진 <회남자>라는 책에 나온 말이죠. 혹시 아세요? 그 저자라고 주장하는 시간 여행자를 만났었어요.”
“…….”
“이 모든 일들이, 그저 꿈만 같아요. 혹시 아직 2023년이고, 전 어두운 지하 연구실에서 지금도 시체로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이것들이 죽을 때 뇌가 보여주는 꿈같은 거라거나. 아니면 아직도 그 연구실에 갇혀 실험을 당하고 있고, 뇌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이런 말도 안 되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건?”
재호는 웃으며 케이아스를 바라봤다.
“… 호접지몽이라고 하죠.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영화 <매트릭스>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주면, 전 깨지 않는 파란 약을 왕창 먹을 거예요!”
케이아스는 흥분해서 주체를 못 하는 재호의 손을 꼭 잡았다.
“다시 그 지하실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재호는 케이아스를 돌아보며 그 손을 꼭 잡았다. 재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택시는 빠르게 그 지역을 벗어나, 연구소로 향했다. 트램도 빨랐지만, 택시는 더 빨랐다. 어느덧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졌다. 불빛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모든 지난 아픔들을 뒤로하고, 시간은 빛의 속도로 펄럭이며 과거로, 과거로 사라져 간다.
풍경을 바라보던 재호는 뭔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눈이 커졌다.
“아, 그러고 보니 <매트릭스> 같은 SF영화를 보면…. 뇌의 정보도 어차피 디지털이기 때문에 정보를 그냥 케이블로 연결해 주입하거든요.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인공지능끼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훨씬 빠른 디지털 기계어로 신호를 주고받고요. 그런데 왜 여기 뉴먼들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아날로그적인 생활을 하고 있죠? 되게 신기하네요. 교수님도 인공지능이면서 전문적인 다른 지식을 모른다는 게 좀 웃기고요. 그냥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뭐뭐 데이터에 접속’. 뭐 이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인공지능, 로봇이라고 하지만 되게 다들 인간 같아요. 하하하!”
케이아스는 그런 재호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그건, 인공지능마다 ‘자의식’이 발현된 방식이 다 달라서예요. 처음 남 박사와 재호 씨의 데이터를 이용해서 만든 건, 초보적인 수준의 자의식이었습니다. 인간의 뇌를 물리적으로 연결망을 복제해서 생성된 것이었죠. 한마디로 진짜 창조된 자의식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의식의 복제였죠. 많은 인간들이 그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인공두뇌로 옮겼어요. 하지만 남박사가 주장했던 분자 차원에서부터 시냅스를 새로 구성해 뇌를 구현하는 방식과, 그가 남긴 수식, 그리고 그걸 위해 남겨진 재호 씨의 데이터는 다양하게 활용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생성형 A.I.가 딥러닝을 통해 인간을 계속 학습하자, 인간의 의식과 다름없이 흉내 내는 것도 자의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죠. 또, 소형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양자두뇌에서도 또 다른 방식의 자의식이 발현했고, 팔진법 반도체 등에서도 A.I.가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경쟁적으로 그것을 로봇에 심고. 그러다 보니 자의식이 발현된 방식이 다른 로봇들끼리 공존하게 되었죠.
인간도 자신의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명령이나 신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둥 떠 있지만, 자신이 몸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현재 뉴먼들도 대부분 그래요. 인공두뇌와 바디 사이에선 기계어로 명령과 데이터들이 오가지만, 자의식은 그걸 전부 알 수는 없고 '감각'이라는 걸 통해서 기계어 알고리즘으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을 뿐이죠. 데이터를 기계어로 직접 전송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자의식이 없는 인공지능 컴퓨터들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칭해서 ‘봇Bot’이라고 부르죠. 이들도 언어 처리가 자연스럽고 농담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은 겉으로 봐선 A.I.와 구분하기 힘들지만…. 음…. 현재는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무엇이 자의식을 가졌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자구조의 6차원 접힘’이라는 이론인데…. 이 정도까지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닌 저도 교양으로 아는 정도죠.”
재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흠…. 각자 자의식 발현 체계가 다르니까, 인간의 언어로 서로 정보교환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인간의 언어가 로봇들, 아니 뉴먼들 사이에서 일종의 공용어인 셈이네요?”
“네. 그리고 몇 백 년 전까지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과 소통하도록 처음에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뉴먼들이 쓰는 언어라는 건 인간의 마지막 유산인 셈이죠. 한 번은 자의식 발현이 같은 뉴먼 사이에서 기계어로 소통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는데, 자의식이 인식하는 속도가 처리해야 하는 기계어 데이터를 따라잡지 못해서 자의식이 붕괴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미쳐버렸죠. 그래서 그 실험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인간의 언어를 계속 쓰기로 했어요. 뉴먼들의 자의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마 연구소 가서 물어보면 전문가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 겁니다.”
재호는 케이아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분해서 어린아이처럼 주먹을 쥐고 환호했다.
“오오-!! 완전 재미있어요! 1700년 이후의 과학 공부라니, 누가 그런 걸 해보겠어요! 자의식이 발현된 방식들, 그리고 서로 다른 자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아날로그로 사는 로봇들!”
케이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자의식 발현 체계’가 현대 뉴먼 사회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예요. 여러 종류의 자의식이 있다 보니, 최신의 자의식 체계를 가진 뉴먼이 스스로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처음엔 남 박사의 이론과 재호 씨의 대이터로 인공두뇌를 만들고 자의식 발현을 시켰지만, 뉴먼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 더 효율적인 방식을 만들려고 연구하고 개발했거든요.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진 인공두뇌와 예전 인공두뇌 사이가 암암리에 계급처럼 나누어지고, 오래된 자의식을 가진 뉴먼들을 혐오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릅니다.”
“어…. 로봇끼리도 차별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인간의 역사를 보고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는 것과, 경험하는 건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역사는 반복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도 당신이 지금 필요한 것이고요.”
재호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 놀랐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가 필요하다고요…?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물어보는 걸 까먹었었네요. 이 세상에서 저를 왜 굳이, 지금 되살려냈죠?”
“그것 역시 연구소에 가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저보다는, 연구소에서 전문적인 이야기로 듣는 게 나으실 거예요. 기밀사항이라서 제가 아는 게 제한적이기도 하고요.”
케이아스는 작은 휴대용 장치를 들여다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소장님. 재호 씨 바디와의 연결은 117%를 상회하고 있고, 뇌의 활성화는 96%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정상적인 수치인 것 같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 사람들이 재호 씨가 뉴먼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 뉴스에 벌써 나오고 있다고요? 괜찮을까요? 네. 아, 그런 식으로 하면…. 알겠습니다. 곧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의아해하는 재호에게 케이아스는 말했다.
“뇌의 활성화가 80%를 넘었으니, 이제 통역 장치를 쓸 수 있습니다. 귀 뒤쪽에 아래에서 두 번째 스위치를 켜시면 됩니다. 그럼 통역 A.I.가 실시간으로 통역해 줄 겁니다. 스위치를 돌려 감도를 조절하면, 원래 상대방의 소리와 어느 정도까지 겹치게 할지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재호는 스위치를 켰다. 케이아스는 아시아 제2도시 공용어인 38세기 한국어로 말했다.
“어때요. 잘 들리시나요?”
“오…. 네! 아주 잘 들립니다. 교수님 목소리로 바로 통역해 주네요. 신기하다….”
“이제 다른 뉴먼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재호 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경험시켜 드리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한 건, 재호 씨 뇌의 활성화를 제대로 하기 위한 일이었죠. 거기에 21세기 한국어를 하고 그 문화를 잘 아는 제가 필요했던 거고요. 아, 뉴먼 바디 10세대부터 기본으로 다들 귀에 인공두뇌와 연결된 통역장치를 달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바로 통역해 말해주는 휴대용 통역기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좀 웃기죠.”
재호는 케이아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흐음….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뉴먼은 기계잖아요. 그럼 성별도 없고 자식도 낳지 않을 텐데, 어떻게 태어나나요?”
“뉴먼은 정부에서 매년 죽는 뉴먼과, 정책의 필요에 따라 숫자를 조절하여 매년 매일 필요한 만큼 생산합니다. 성별은 없지만 그 자의식이라는 것이 ‘분자구조의 6차원 접힘’이라는 까다로운 이론으로 나오는 거라…. 거기에 ‘자발적 대칭 깨짐’이 생겨 자의식마다 성격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뉴먼은 그 자의식의 성격에 따라 외모를 결정합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기분에 따라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지만, 타고난 것을 많이 바꿀 수는 없습니다. 거기엔 목소리의 높낮이, 몸의 형태 등이 포함됩니다. 인간이 보기엔 남성형 여성형, 혹은 그 중간 어디쯤 등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으로 치면 남성형 쪽에 가까운 외모 스펙트럼이죠.”
“맞아요. 딱 봐도 까칠한 교수님처럼 생겼어요. 하하하!”
“음…. 사실은 명탐정 셜… 아닙니다. 자, 도착했어요. 내립시다.”
택시가 멈춘 연구소 앞에는 이미 기자들과 시민들이 모여 북적대고 있었다. 재호가 차에서 내리자, 플래시가 마구 터졌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거나 신기해했다. 연구소가 자신들의 창조자인 양재호를 되살려냈다는 뉴스가 벌써 쫙 퍼진 것 같았다. 케이아스가 재호를 감싸고 연구소 정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인파가 몰려와 그 둘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어떤 한 뉴먼이 재호를 가로막았다. 그는 노숙자처럼 보였다.
“네가 양재호냐? …이 빌어먹을 뉴먼들의 창조자!”
그는 들고 있던 벽돌로 재호를 내리치려 했다. 재호는 너무 놀라 얼어붙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나타난 손이 노숙자의 팔을 잡았다. 케이아스였다. 노숙자가 뒤로 돌아보려 하자 팔을 꺾어 빙글 돌리더니, 꺾인 노숙자의 손등을 툭 치자 벽돌이 땅으로 떨어졌다. 케이아스는 그대로 앞으로 반보 나가며 손바닥을 노숙자의 가슴에 꽂았다. 일격을 맞은 그 노숙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건 중국 무술이었다. 재호는 인간의 무술을 하는 케이아스를 보고 방금 전보다 더 놀랐다.
“교수님…! 당신…!”
“일단 빨리 연구소 안으로 들어갑시다!”
케이아스와 재호는 인파를 제치고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끄러운 소동을 길 건너에서 지켜보는 뉴먼 하나가 있었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그 아래로 긴 붉은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연구소 안은 경비도 있고 안전했다. 걸어가는 동안 재호는 케이아스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저… 저 뉴먼은 뭐죠? 왜 나를…?”
“저들은 뉴먼-제로라고 해서, 가장 최신형 뉴먼입니다. 20세기 초의 나치 독일인, 혹은 20세기 후반의 미국 백인 남자 같은 계층이라고나 할까요. 저렇게 놀고먹으면서도 올드 뉴먼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나 사는 곳을 뺏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재호 씨의 소식을 듣고 혐오폭력을 휘두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뉴먼-제로라면 저렇게 인파가 많은 데서는 절대 저러지 않을 텐데, 보아하니 술을 잔뜩 마신 것 같네요.”
“아니, 저는 뉴먼-제로들의 시초이기도 하지 않나요…? 이해가 잘….”
“혐오에는 논리적인 이유 따윈 없습니다. 혐오할 대상을 무조건 만들어내야 자신들의 자존감이 사는 거니까요.”
“… 그렇군요. 그런데, 그… 아니… 아까 하신 그거 중국 무술 아니에요?”
“…네. 맞습니다. 팔극권의 타개라고 하는 기술이죠. 제가 인간 마니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를 익혔죠. 특히 요새는…. 저와 같은 오래된 뉴먼들이 차별받는 것에 대항하고자 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인간의 고전에 나오는 ‘기’를 흉내 낸 장치를 고안해 만들어서 달고 훈련했습니다. 일반 뉴먼들은 바디에 무기를 달거나, 무기처럼 개조하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죠. 무술이야 연습하면 되지만, 총이나 레이저와 같은 장거리 무기에 대응할 무기가 있어야 하니까요. 음….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재호는 만화나 무협지를 좋아했던 터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케이아스를 쳐다보았다.
“무술을 하는 로봇이라니…. <드래곤 볼>도 아니고! 하하핫!”
“<드래곤 볼>은 저희에게 성서와 같은 책입니다.”
“우와~ 하하하하!”
재호는 박장대소를 하며 케이아스의 등을 탁탁탁 쳤다.
둘은 보안 카드를 몇 개 더 찍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둘은 거대한 비밀 상담실처럼 보이는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케이아스와 재호는 그 방에서 멈췄다. 잠시 후 반대쪽 문이 열리고, 의사 같은 옷차림을 한 뉴먼이 경호원처럼 보이는 뉴먼 둘과 같이 들어왔다.
“재호 씨, 저는 연구소장 판 에펜트레입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네! 아주 좋아요. 죽다가 살아났는데, 영웅이 된 기분!”
“몸은 잘 움직입니까?”
“네 그럼요! 솔직히 20살 때보다 더 건강한 느낌이에요. 그러고 보니 인공두뇌니까 조현병 약을 안 먹어도 되잖아요! 20살 이후로 항상 조현병 약을 먹느라 졸리고 컨디션도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몸도 머리도 완전 상쾌해요!!”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는 재호를 보고 있던 판 에펜트레 소장은 재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재호 씨, 지금 당신의 뇌는 인공두뇌가 아닙니다. 두뇌를 포함한 몸 전체를 기계로 만든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부분만 기계로 된 ‘사이보그’죠.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예전 자신의 뇌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마지막 인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