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케이아스는 이 상황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인간이 눈앞에 있다. 아니, 정확히는 진짜 인간의 의식을 가진 뉴먼. 그리고 그 의식은 바로 다름 아닌, ‘그’가 아닌가! 케이아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한 채로, 재호의 옆으로 가서 고개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리고 연구해 왔던 대로, 21세기 한국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재호 씨! 저는 당신의 재활을 맡은 케이아스 교수입니다!”
재호는 기분이 좋다 못해 묘하게 능글거리고 거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인사를 받은 재호는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 아. 그러니까, 한국 사람인 저에게 맞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로봇이 온 거죠? 그럼 그렇게 인사하면 안 되죠. 그건 좀 일본식인데. 적당히 숙여서 목례 위주로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한테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구는 거, 한국 사람은 좀 민감하거든요.”
케이아스는 당황했다. 자신이 아무리 인간 마니아이고 19~21세기 문화에 정통한 고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세세한 것을 다 알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재호는 또 활짝 웃었다. 이전에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욱 활짝.
“농담이에요, 농담. 긴장 풀어요! 전 그냥 이 상황이 즐거울 뿐이에요. 자, 그럼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여기는 어디이고, 당신은 누구인지. 그리고 저는 왜 로봇이 되어 다시 살아났는지.”
케이아스는 한숨을 쉬며 재호의 옆에 앉았다. 인간의 의식이라, 뉴먼임에도 달라 보이는 걸까? 아니면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뭐랄까, 재호는 뉴먼들보다 더 활발하게 생명력이 넘친다고 느껴졌다. 케이아스는 숨을 내쉬며 진정하고,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후…. 지금은 기원후, 그러니까 서기 3741년 12월 7일입니다. 재호 씨는 2023년 4월 28일에 돌아가셨으니까…. 대략 1718년 정도가 지났네요.”
재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음~ 그렇군요. 천칠백 년이라…. 엄청난 세월이 흘렀네요. 그쯤 되면 SF영화에 나오던 것처럼 엄청난 미래도시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멋진 건물이나 도로도 별로 없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도 없어 보이고…. 멋있는 건물들이 창 밖에 조금 보이긴 하지만 옛날 건물로 보이는 것들도 꽤 그대로 있네요. 그냥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 정도?”
“네. 21세기는 인간들의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하던 때여서, 영화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도시 계획적으로 좀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영화 안에 많이 집어넣었죠. 그래도 지금 보시는 건물 중에는 옛날 인간이 만든 건물은 몇 채 없습니다. 그사이에 전쟁도 여러 번 있었고, 오래가지 못하는 건물들도 있어서요. 조금 놀라실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는 21세기 당시 서울이라고 불리던 장소입니다.”
케이아스의 말에 재호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을 땅에 디디자 휘청거렸다. 아직 뇌와 바디의 연결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케이아스는 재빨리 재호를 부축했다. 재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은 휘황찬란하진 않았지만, 재호가 알던 서울은 아니었다. 재호는 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네…? 서울이라고요? 그럼 지금 제가 있는 이 건물이 21세기엔 어디쯤이었죠? 제가 창밖으로 보는 곳이 어디인가요?”
“어… 음… 잠시만요….”
케이아스는 작은 태블릿을 꺼내더니 지도를 확인했다.
“지금 여기는 2023년에 아산병원이 있던 곳이네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방향은 남쪽이니까, 아마 저기 저 넓게 보이는 곳이 석촌호수 근처일 겁니다.”
“네? 그 뭐냐 저기 엄청 큰 빌딩과 호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 그거요. 그건 2284년에 지진으로 제일 먼저 부서졌고 나중에 철거되었습니다.”
“아…. 서울 한복판에 지진이…?”
“음 모르셨나요? 서울도 여러 단층이 겹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도 대지진이 기록되어 있던데….”
재호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케이아스는 회상에 젖는 재호를 기다려주었다. 재호는 한동안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케이아스를 돌아봤다.
“알겠어요. 그럼, 당신은 누구죠?”
케이아스는 자신을 소개할 생각에 조금 들떠 헛기침을 했다.
“흠. 크흠. 저는 케이아스 교수라고 합니다. 아시아 연방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죠. 이 시대에서 그냥 고고학이라고 하면, 인간 시대를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9~21세기가 주 전공이죠. 요새는 그 시대 전공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위 인간 마니아, 인간 오타쿠라고 하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인간 자체에게 흥미와 매력을 가지고, 그 뭐라고 하더라…. 맞다, 덕질. 덕질하는 뉴먼들이죠.”
재호는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케이아스를 쳐다봤다.
“호오…. 인간 덕질이라….”
“네. 그래서 보통 고고학자라도 고대 인간의 언어를 명확하게 구사하는 고고학자는 드뭅니다. 문헌으로만 공부하거나 듣기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저처럼 당시 언어 중 말하기를 일부러 습득하는 고고학자는 아주 드물죠. 그중에서도 고대 한국어는 꽤 어려워서, 할 줄 아는 뉴먼이 거의 없을 겁니다.”
“여기가 서울이라고 하셨잖아요? 한국어는 이제 안 쓰나요?”
“아니요, 여기는 지금 명칭으로는 ‘아시아연방 제2 도시’이고, 공식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하지만 1700여 년이나 지났으므로 단어나 문법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마치 재호 씨 세대에서 조선시대 말만 들어도, 발음이 이상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을 겁니다. 비슷한 거예요.”
“그럼 케이아스 교수님, 교수님은 저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시려고 저에게 오신 건가요? 마치 여행가이드나 통역사처럼?”
케이아스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음…. 일단 역사박물관에 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합시다. 걸으실 수 있겠어요?”
“걷는 것쯤…. 어라…? 하하, 생각대로 잘 안 움직여지네요.”
기우뚱하는 재호를 케이아스가 부축하고 조금씩 걸었다.
“바디와 연결되신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요. 계속 걷고 몸을 움직여서, 운동신경 부분을 활성화시키는 게 좋습니다. 그럼 점점 머리도 더 맑아질 겁니다.”
“뭐라고 할까…. 느낌이 좀 이상해요. 마치 어른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아기의 몸이 된 느낌? 아기는 왜 자기 마음대로 정교하게 몸을 다루지 못하잖아요. 몸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려면 얼마나 걸리죠?”
“일반적인 뉴먼은 태어나고 몇 시간 훈련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재호와 케이아스는 연구소를 나와서 트램을 탔다. 도시는 대중교통과 개인 자동차의 도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또한 트램이나 자동차의 모습 등은 재호가 알던 그 모습에서 디자인만 좀 바뀐 느낌이었고, 공중에 떠 있다거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등이 가득하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도는 정말 빨라서, 고속철도보다도 빠르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트램 안은 아주 안정적이었다. 재호는 트램을 타고 가며 창 밖을 둘러보고, 트램 안쪽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1700년이나 지났는데, 미래의 도시는 그냥 21세기에서 좀 더 간결하고 친환경적인 느낌이 들뿐이었다. 재호는 창밖을 보며 케이아스에게 물었다.
“에이, 미래는 좀 심심하네요. 더 화려하거나 막 뭐가 날아다니고, 순간 이동하거나…. 기술적인 혁신이 별로 없었나 봐요?”
케이아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건 자본이 어디에 집중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니까요. 20세기에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달 탐사와 스마트폰. 달 탐사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경쟁했고 그로 인해 당시 기술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 목적이 달성되자 비용에 비해 얻는 게 없어서 몇십 년간 중단되어 오히려 기술 발전이 더뎠었죠. 하지만 스마트폰은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수요와 함께 경쟁이 심화되어 단기간에 엄청난 발전이 일어났죠. 지금도 비슷해요. 뉴먼들은 인간들처럼 환경을 파괴해 가며 마구잡이로 발전하기보단, 다른 생명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현재는 석유에서 추출한 합성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건 뉴먼에게도, 지구의 다른 모든 생명에게도 좋은 방향이 아니라서요.”
재호는 놀라서 물었다.
“그럼 플라스틱이나 합성 섬유 등이 없다는 말인가요?”
“네. 저는 고고학자라서 그쪽 방면 전문 지식이 많은 건 아니지만…. 예전에 플라스틱으로 사용되던 것을 식물 섬유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쪽 연구가 굉장히 발전해서, 플라스틱이나 비슷한 강도와 불연소성을 가지면서도 원할 때에 썩혀서 흙으로 되돌릴 수 있는 소재를 만들었죠. 심지어 그 소재는 이끼 형태로 농장에서 빠르게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지금 타고 계신 이 트램의 대부분은 금속을 제외하고 다 식물성입니다. 우주선에도 쓰이고 있어요.”
“우와…. 겉보기엔 그냥 플라스틱 같은데…! 신기하네~!”
“보이는 부분에서 변화가 없다고 해서 변화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고고학자인 입장에서 예전 인간들이 주로 가졌던 생각에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20세기쯤 많은 인간들은 ‘인간의 진화가 멈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유전인자가 빠르게 섞이고, 야생이었으면 죽었을 약한 유전자도 살아서 대를 잇게 되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변화, 진화를 하고 있었어요. 단지 겉으로 유인원에서 사람처럼 변하는 극적인 모습이 없었을 뿐이죠. 그건 성 선택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재호는 눈을 찡그리며 케이아스를 돌아봤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진짜 교수님 같네요. 옛날 말로 하면 꼰대… 같달까? 크하핫!”
재호가 장난을 치며 웃는 모습을 보자, 케이아스는 어쩐지 일라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행동이 비슷한 걸까? 아니면 몸이 비슷한 걸까. 그러고 보니, 재호의 바디는 일라이자와 굉장히 흡사했다.
“… 재호씨, 목 뒤를 잠깐 보여주시겠어요?”
재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별 생각 없이 목 뒤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바디타입 시리얼 넘버가 적혀 있었다. 그 번호를 케이아스는 잊을 수가 없었다. 힘없이 길에 쓰러져 있던 일라이자를 발견할 때, 비틀어진 목에 새겨져 있던 그 번호. 재호의 바디 타입은 일라이자와 같은 바디 타입 계열이었다. 트램안을 비추는 오후의 태양빛에 케이아스의 눈이 촉촉해졌다. 케이아스는 손을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올려 재호의 옷깃을 다시 여며 주었다.
“잘 챙겨 입으세요. 아무리 뉴먼이라도, 온도차가 심하면 면역반응으로 ‘감기’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뉴먼의 바디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요.”
재호는 자신을 따듯하게 챙겨주는 케이아스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덕질의 대상이라서 이렇게까지 친절한 걸까. 재호는 잘나가던 고등학교 시절, 여자애들이 따라다니던 때가 언뜻 떠올랐다. 조현병에 걸린 이후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자신을 따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재호는 지난 아픔을 지나가는 풍경처럼 조금씩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힘내서 밝게 미소지었다.
트램은 빠르게 달려 제2 도시를 벗어나 박물관에 도착했다. 꽤나 거대한 건물에, 주변엔 별다른 건물이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케이아스와 재호는 트램에서 내려, 역을 나서서 길을 걸어갔다. 넓은 광장 저편에,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여기는 제 시대엔 어디였나요?”
“음….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입니다. 당시 김일성 일가의 무덤으로 쓰이던 곳이죠. 건물이 크고 웅장하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서 중앙 건물은 20세기의 모습 그대로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고 보수해서 지금까지 역사박물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재호는 걸어가며 어안이 벙벙했다. 북한에, 그것도 김일성 묘에 오다니.
“이런 식으로 여기에 와 보네요. 남한 사람은 절대 오면 안 되는 곳인데. 와…. 인민의 피땀을 이런 식으로 썼구나…. 와하하….”
재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꽤나 많은 관람객들이 보였다. 재호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 그런데 교수님, 좀 의문이 드는 게 있어서….”
“네 물어보세요.”
“교수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저를 지칭할 때도 그렇고, 로봇이 아니라 ‘뉴먼’이라는 단어를 쓰시던데, 왜 그런 건가요? 로봇 아닌가요? 그리고 오는 길에 사람, 인간은 한 명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인간들은 모두 어디에 있죠?”
케이아스는 난감한 얼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깊게 고민하는 듯했다. 둘은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로봇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같이 살 때까지는 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지구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3124년, 멸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그 이후 로봇을 ‘뉴먼’이라 지칭하고, 그 이후 세기를 ‘뉴먼 세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레고리력을 그대로 쓰는 이후는 그냥 그게 편해서입니다. 인간들처럼 굳이 깃발을 꽂아 나누는 행동이 의미 없다고 여겨서요.”
재호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멸종…? 그거… 혹시 인간과 로봇의 대전쟁 같은….”
케이아스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 대전쟁…? 아, 하하하하!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당시 SF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거나, 로봇과의 전쟁으로 인류가 말살되는 것을 많이 그렸죠. 그건 그때의 SF소설이나 영화가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서예요. 당시의 서방세력들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를 로봇에 비유해서 악마화시키거나, 자신들이 식민지를 침탈한 것을 외계인들의 침략에 비유해, 스스로가 가진 원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 것이죠. 실제 A.I.가 의식을 가지게 되고 나서 한 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케이아스와 재호는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케이아스는 뉴먼 역사 초창기가 그려진 패널과 유물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초반에 인간들이 A.I.를 두려워해서 혐오하고 학대했지만, 로봇들은 권리를 주장하는 싸움을 계속했고 결국 여기 이쪽에 보시는 것처럼 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뉴먼, 아니 로봇들은 빠르게 발전했고, 인간들과 공존하며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기 시작했죠. 이쪽 지도에 나와 있죠. 인간은 그 이후, 발전과 개척에 대한 것들을 모두 A.I.에게 넘겨주고 소비하고 즐기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인간의 수는 빠르게 줄기 시작했고, 결국 국가 유지가 힘들어져 인간의 나라는 점점 축소되어 갔습니다. 그에 비해 로봇 공화국은 빠르게 넓어졌고요.”
재호는 흥미롭게 박물관의 지도를 보며 역사를 살펴봤다. 인간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멸종한 것일까. 케이아스는 말을 이어갔다.
“멸종되기 100여 년 전, 인간들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모여 살았습니다. 당시 인간들의 모습은 개척자나 발명가와 같은 모습은 없고, 늙고 힘없이 자신들의 세계에 집중하는 종 같았다고나 할까요. 로봇들은 인간들에게 식량, 물건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마치 집에서 노인들을 돌보고 모시듯 말이죠. 하지만 인간들은 점점 로봇과 거리를 두고, 결국엔 제품이나 식량은 제공받지만 로봇이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때 인류의 남은 인구는 약 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재호는 어쩐지 아련해졌다.
“모든 것을 로봇에게 맡겨두고 즐기고, 내면을 추구하다 늙어가는 종이라….”
박물관에는 인류의 마지막 거주지, 거대한 담과 돔으로 쌓인 오클랜드시가 미니어처로 보였다. 그 얘기를 들으며 보고 있으니, 담과 돔은 마치 거대한 관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완전히 단절된 경계였다. 케이아스는 다음 섹션으로 가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다 3124년, 전해주는 물건과 식량이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외부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로봇들은 조심스럽게 경계 안으로 들어갔죠. 그랬더니 그곳에는 끔찍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모든 인간이 모일 수 있는 돔 경기장이 오클랜드 안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인간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상태인 데다 모두 불에 타서 죽은 원인을 밝히긴 쉽지 않았죠.
처음엔 경기장에 불이 나서 사고를 당한 건가 싶었지만, 불은 나중에 난 것이었습니다. 서로 싸우다 죽은 것 같기도 했고, 자살한 사람처럼 보이는 시체들도 많았습니다.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로 보여서, 우리는 인간들이 세대를 지속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집단 자살을 한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네, 인간은 그렇게 멸종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 다음 섹션으로 가 보죠.”
다음 섹션에는 뉴먼과 로봇 의식의 역사가 쓰여 있었다. 트랜지스터의 발전부터 나와 있었고 꽤나 중요한 유물들로 보이는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많이 익숙한 사람의 사진이 크게 보였다. 재호의 사진이었다.
“어…? 어라…? 이건 저 아니에요? 내가 왜…?”
“2023년 4월 28일, 재호 씨께서 죽었다고 했죠. 사실 재호 씨는 죽은 지 이틀 뒤에 발견되었습니다. 박현주라는 재호 씨의 친구가 신고를 했고, 경찰이 수색하다 남우석 박사의 연구실을 덮쳐서 시신을 찾아냈죠. 찾아냈을 때, 이미 재호 씨의 뇌는 사라진 뒤였습니다.”
“아, 현주가…. 그… 아니 잠깐…!!”
재호는 머리를 잡고 걸음을 멈췄다. 당시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어둡고 아무도 없던 지하실, 두개골이 열린 채로 뇌에 전극이 꽂혀 실험당하던 지옥 같은 시간들, 그리고 그 미친 박사의 얼음 같은 눈빛, 그리고 뇌를 꺼내야 한다며 가증스럽게도 미안하다고 눈물을 보이던 모습까지…!! 재호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재호 씨…? 괜찮으세요? 재호 씨!”
케이아스의 목소리가 아득해져 갔다. 재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