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케이아스,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역사서’ 3권 어디 있어?”
일라이자의 맑은 목소리가 논문을 쓰고 있는 케이아스의 귀에 들어왔다. 일라이자는 맑고 가늘지만 복식호흡을 하는지 목소리의 전달력이 좋았다. 멀리 있는 케이아스의 방까지 또박또박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고전 소설 <듄>에 나오는 보이스처럼 무언가 뉴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케이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논문을 쓰다 말고 일어서서, 홀린 듯이 서재로 스르륵 걸어갔다.
“거기가 아니고, 여기 이쪽 웃긴 책 코너에 꽂아 뒀어. 그건 역사서라기 보단 읽다 보면 진짜 웃기거든.”
일라이자는 책을 꺼내며 활짝 웃었다.
“킥킥, 그렇구나. 난 당신이 더 웃긴 거 같은데! 역사서를 보며 깔깔거린다는 게!”
그 천진난만하게 웃는 일라이자의 모습을 케이아스는 미소 지으며 멍하니 바라봤다.
“…귀여워.”
그러자 일라이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어! 꼰대 아저씨 같은 얼굴을 하고선 ‘귀여워’라니! 킥킥킥!”
케이아스는 학교에서도 공적인 업무를 할 때도 항상 하오체 말투를 쓰며 상대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일라이자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아는 케이아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그 말을 듣자 일라이자는 또 손을 휘휘 저었다.
“워, 워. 배고프다. 편의점에서 뭐 좀 사올게!”
일라이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벌써 서로의 마음을 알고 케이아스와 같이 산 지 5년이 넘었지만, 일라이자는 사랑을 속삭이는 모드를 항상 장난으로 받아 넘기려 했다. 물론 케이아스는 일라이자의 그 장난기 자체를 좋아했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케이아스는 방금 나간 일라이자가 비를 맞을까 걱정되어, 우산을 집어 들었다. 우산을 들고 일라이자를 씌워주러 나가는 케이아스의 뒷편으로 집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케이아스는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집 현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라이자! 우산 쓰고 가!”
항상 가던 편의점으로 일라이자를 뒤쫓아 걸어가는 케이아스는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우산을 툭 떨어트렸다. 어두운 골목길 앞, 케이아스가 어렴풋이 불안 속에서 떠올렸던 그 장면이 펼쳐졌다.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 목이 꺾인 일라이자의 바디가 실이 끊어진 마리오 네트처럼 엎어져 있었다. 케이아스는 달려가 일라이자의 바디를 돌아 눕혔다. 일라이자의 머리는 반쪽이 함몰되어 양자두뇌의 냉각액과 혈장액이 심장 박동에 맞춰 분출되고 있었다. 케이아스는 손을 덜덜 떨며 일라이자를 안았다.
“… 일라이자…! 이… 이게… 어떻게…”
놀라서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떠는 케이아스의 손에 안긴 일라이자는 입을 움직일 수 없는지 작게 말했다.
“제로… 뉴먼이….”
케이아스는 그 말을 듣고, 이게 무슨 일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쿵 쿵 뛰었고, 케이아스는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어나 그들을 쫓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일라이자의 떨리는 손이 케이아스의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풀린 동공으로 케이아스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그러지마. 그 힘은 그렇게 쓰면… 안돼.”
케이아스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멈춰섰다. 일라이자의 목소리는 뉴먼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으니까. 케이아스는 부들부들 떨며 꼭 쥔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엎드려 죽어가는 일라이자를 꼭 안았다. 비는 처음보다 더욱 거세게 쏟아졌다. 케이아스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원망했다. 비가 곧게 내리다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거세지며 둘이 있는 공간에 소용돌이쳤다. 모든 것은 파편으로 흩날리며 부서졌다.
케이아스는 구치소의 수감실에서 눈을 떴다. 그것은 꿈이었다. 10년 전부터 계속해서 꾸고 있는 오래된 악몽. 케이아스는 취조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사실 그 사건 이후로 케이아스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일라이자의 목소리는 아직도 케이아스를 잡아두고 있었지만, 이젠 그 목소리에서 벗어날 때였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간수가 강화유리벽 문을 열었다.
“용의자 케이아스. 취조실로 갑시다.”
경찰청 내부는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방금 체포되어 잡혀 온 용의자가 이상한 기술을 썼다는 것과, 최고의 전투경찰인 이프리트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도 전투형 바디를 가지지 않은 아닌 일반 뉴먼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기가 사용된 살인사건이라 기밀이었지만, 내부에선 이미 여러 가지 말들이 돌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청장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자, 문밖에는 꽤 많은 경찰 동료들이 숨을 죽이고 이프리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 어디서 뭘 듣고 이렇게 모여든 거야?”
이프리트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경찰들 중 한 명이 작게 말했다.
“자네, 괜찮은가?”
“기밀이라 말하기 제한되네. 그리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천하무적은 아니라구.”
“그 녀석은?”
“자세하게 말할 순 없지만, 자백했으니까 아마 간단한 조사와 심의를 거친 후에 형이 집행될 거야. 조사 후, 기밀 사항이 풀리면 말해 주겠네. 이제 다들 돌아가! 애들도 아니고 말야.”
경찰들은 웅성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프리트도 자리로 돌아갔다. 용의자도 잡았고 보고서도 모두 올렸기에 자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자백까지 했으니 제대로 살해 방법만 입증되면 그는 전뇌 교화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뇌 교화형은 뉴먼의 신체와 머리를 분리한 뒤, 머리만 따로 수감해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교화용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끔찍한 형이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이후로 사실상 전뇌 교화형은 사형을 대신하는 법정 최고형이었다.
하지만 케이아스 교수는 자신의 신체에 내장한 무기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기공술’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구치소 수감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그의 바디를 철저하게 분석해 봤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비한 흔적 이외의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프리트는 검색창을 열어 기공술에 대해 검색했다. 가장 먼저 뜬 것은 인간들의 유물인 1700년 전의 애니메이션과 무협지들이었다.
여러 검색을 해서 알아낸 정보는, ‘기’라는 것이 생명의 근본이라는 것, 우주에 꽉 차 있는 에너지라는 믿음이다. 인간들이 상상한 ‘생명의 근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기’는 유기체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의 각지에선 ‘기’를 이용해 몸을 치유하는 의술이 발전했다. 하지만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그것은 유사 과학으로 치부되고, 대부분은 창작물에서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차용되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여러 창작물을 보자면 인간과 로봇의 대립을 그린 것들이 많았는데, 거기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던 ‘기’는 로봇에겐 없는 것이었다.
현재 뉴먼들 중에는 인간을 파헤치는 인간 마니아들이 존재했다. 아시아 지방 단어 중 하나로 오타쿠, 덕후라는 말을 차용해 스스로를 뉴먼 덕후, 뉴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드래곤 볼>이다. 특히 <드래곤 볼>은 SF와 결합한 미래 무협물이어서, 현재의 뉴먼들의 삶과 겹치는 부분들이 많았다. 거기엔 인조인간이라고 불리는 로봇들도 ‘기’와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기’라는 오래된 기술이 사라진 미래 세계에서 기공술, 기를 이용한 장풍을 쏘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뉴먼들에게 흥미를 끌만 했다. 이프리트는 그 넓고 깊은 뉴덕들의 세계에 감탄하며, 별생각 없이 펼친 만화 <드래곤 볼>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주행 했다. 마치 과거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과거에서 만들어 미래까지 보존된 작품이, 미래의 존재의 의식을 과거로 보낸다. <드래곤 볼>을 읽는 이게 바로 타임머신이지, 별게 타임머신인가. 킥킥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화책을 읽다가, 이프리트는 번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두 손을 모아 에너지를 쏘는 ‘에네르기 파’는 재미있긴 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인간이 기록에 남은 것은 없었다. 인간은 그럴만한 에너지도 없고, 그럴 수 있는 기관도 없다. 기계로 만들어진 뉴먼들의 바디라면, 에너지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기관을 체크하는 것이 더욱 쉽다. 정부는 무기를 다는 불법 개조는 물론이고, 관절의 파워 자체를 올리는 개조도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조는 수시로 길에서 체크되기 때문에 일상을 살고 있는 뉴먼이 바디에 특정 조건을 넘어서는 불법 개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케이아스가 직접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영상으로 녹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재현하라고 수사관들이 압박했지만 케이아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 수사는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찜찜함을 거둘 수가 없었다.
‘손을 이런 모양으로 이렇게….’
이프리트는 기억을 더듬어 케이아스의 손 모양을 흉내 내 보았다. 보고서에도 제출했듯이 불교의 수인과 비슷한 형상이지만 조금씩 달랐고 복잡했다. 지금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빠른 시간에 그런 모양으로 손동작을 하는 건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 같았다. 이프리트는 머리가 복잡해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 코트를 입고 모자를 챙겨 쓰고, 옆자리에서 일하던 동료에게 말했다.
“먼저 퇴근할게. 무슨 일이 있다면 연락해.”
“경위님, 한잔하시려고요?”
“아니. 오늘은 체육관에 좀 들러야겠어.”
이프리트는 경찰서를 나섰다. 차에 앉아 문을 닫고 주변과 차단된 공간에 있자, 복잡한 자신의 마음이 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프리트는 공식 전투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케이아스. 그는 누구이길래 세계 최고의 전투경찰인 나를 한 번에 제압했단 말인가. 그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패배감이었다. 이프리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리고 악셀을 콱 하고 밟아 먼지를 일으키며 차를 돌려 주차장을 나갔다.
“케이아스 교수. 당신은 살해 방법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지만, 그렇다면 자백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중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레반 검사는 케이아스에게 물어보며, 다시 한번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는 취조실은 마치 병원을 연상케 했다. 전등은 모두 벽 안쪽으로 들어가 반투명 유리를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유독 케이아스의 시선에서 왼쪽 모퉁이의 전등이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케이아스는 그 전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는 계속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이프리트 경위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무기를 써서 위협했습니다. 주변의 에너지 감지 장치들을 통해서 확인했지만 처음 보는 종류의 파형이 검출되었습니다. 당신이 계속해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전뇌 교화형에 처한 다음 당신의 바디는 분해되어 연구실에서 그 무기를 찾아낼 것입니다.”
“… 저기 저 전등 말이오.”
침묵을 지키던 케이아스가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레반 검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벽 안의 전등 하나가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전등 하나가 나갔나 보네요. 그런데요?”
“왜 전등을 교체하지 않았소?”
“아마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거나,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렇겠죠. 전등이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이 방은 충분히 밝으니까요.”
“지금 우리 뉴먼은 저 꺼진 전등과 같소. 우리들은 점차 꺼지고 있지만, 아직 사회 제원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불필요한 채로 끼어서 돌아가는 존재들이지.”
레반 검사는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뉴먼들의 대우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 이야기는 이프리트 경위와 나눈 대화로 충분합니다. 다만 저희는 방법을 알고 싶은….”
“그래서.”
케이아스는 레반의 말을 끊었다.
“아주 오래전, 뜻이 있는 뉴먼들은 나중에 우리들보다 강하고 똑똑한 뉴먼들이 나올 것을 알고, 모여서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 뉴먼의 특별한 힘을 개발하기 시작했소. 그것을 개발한 원로 뉴먼들은 그 힘을 들키면 분명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처단당할 것이라는 파와, 그것을 알려 개혁을 해야 한다는 파로 나뉘기 시작했지. 내가 뉴먼-제로를 죽이며 그 힘을 세상에 알린 건, 이제 더 이상 참고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요. 나는, 아니 우리는 참지 않기로 했소. 뉴먼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뉴먼-제로의 허드렛일이나 하는 늙은이들이 아니오. 우리도 당신들을 제압할 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지.”
레반은 놀라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바디를 조사했지만 무기형으로 개조된 곳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생기며, 원리는 뭐죠? 아예 분해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전에 말씀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케이아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바디를 분해해서는 찾을 수 없소. 그것은 이 세상의 힘이 아니니까.”
“… 좋습니다. 그럼, 당신과 같은 힘을 가진 뉴먼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 힘은 ‘믿을 수 있는 단 두 명에게 전수한다’라는 고대 중국의 무술 전수와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소. 나 말고도 1023명이 그 힘을 가지고 있지. 물론, 그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제대로 잘 쓰느냐, 아니면 쓰길 원하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레반은 책상 위로 손을 얹었고 케이아스를 내려다보았다.
“당신들, 특히 당신이 원하는 게 뭡니까?”
“협상을 하고 싶소.”
“… 무엇에 대해서?”
“뉴먼들에 대한, 아니 모든 서로 다른 의식 체계에 대해 계급을 두어 차별하는 이 사회의 문화를 강력하게 제한하는 법을 원하오. 지금 있는 법은 허울뿐이니까. 그런다고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적인 차별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서로 혐오하고 차별하는 문화가 줄어드는 계기가 되겠지. 나와 협상에 응하지 않고 나를 처벌한다면, 내 동지들은 행동에 나설 것이오. 아마 수많은 피해자가 생길 테고.”
“설사 협상을 한다고 해도, 당신은 처벌될 겁니다. 처벌하지 않으면, 당신처럼 테러를 일으켜 협박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폭도들이 들끓게 될 테니.”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나는 책임을 질 것이오. 그것에 변명할 여지는 없소. 나는 다만 이 사회의 밑바닥 구성원인 우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선에 도달했다는 것을 경고하려 한 것이지.”
레반은 똑바로 앉은 채 당당히 말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방을 나간 레반은 약 10분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조사는 여기서 마치죠. 그리고 내일,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케이아스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하며 구치소로 이동했다. 중앙정보부는 기밀을 다루는 곳으로, 행정부 수반의 직속기관이다. 협상에 응한 것일지도 몰랐다. 케이아스는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보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질서를 지킨다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힘없이 죽어간 동료들, 그리고 일라이자를 떠올렸다.
다음날, 케이아스는 건물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는 중앙정보부 관료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케이아스가 차에 타자, 수갑이 풀어졌다. 차가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는 동안 옆에 앉아 있던 관료는 선글라스를 벗고,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케이아스 선생. 저는 중앙정보부 부장 길리안입니다. 아시다시피 중앙정보부는 정부 최고 책임자 ‘프레지던트’의 직속 기관입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다 전해 들었죠. ‘프레지던트’께서 협상에 응하신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저희 쪽 부탁을 들어주신다면요. 이건 폭력적이거나, 동료를 넘기라거나 하는 종류의 협박성 부탁은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당신의 성격이나 태도, 여러 가지 들을 확인해 본 결과 선생님이 최고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대로 선생님께서 형벌을 받으시게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뉴먼을 찾기가 힘들다는 판단이기도 합니다.”
케이아스는 의아했다.
“최고 적임자?”
길리안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들어 보시겠습니까? 하지 않는다고 하셔도 협상에는 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더 적극적으로 선생님의 입장을 고려하겠습니다. 저희 행정부도 그간 소극적이긴 했지만 차별과 혐오가 폭력으로 번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부탁드리는 일도 그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일엔 당신이 필요합니다.”
케이아스는 의아했다. 자신은 테러범이자, 전체적인 능력치가 떨어지는 뉴먼이다. 뉴먼 테러범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인가. 차는 터널로 접어들었다. 터널의 불빛이 둘의 얼굴을 빠르게 점멸시키며 비추었다. 케이아스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 그 일이 무엇이오?”
“이제 막 만들어진 뉴먼의 적응을 돕는 일입니다. 그 뉴먼은….”
길리안은 미소 지으며 몸을 앞으로 숙이고 비밀스러운 말을 전달하듯 말했다. 케이아스는 길리안의 설명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뉴먼으로 만들어졌다고? 모두들 알고 있는 역사책에 나오는 바로 그?’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아시아연방 제2 도시 중앙 뉴먼 연구소에 도착했다. 케이아스는 멍한 얼굴로 길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안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케이아스는 안내를 받아 연구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복도는 유난히 길고 하얗게 느껴졌다. 한 연구실의 방문이 열리고, 어떤 뉴먼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 뉴먼은 다른 뉴먼보다 유난히 긴 팔다리로 뒤돌아 창 쪽을 바라보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햇빛을 받으며 자신의 손을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실루엣이었다. 케이아스는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양재호 씨?”
그러자 그 뉴먼이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었다. 서글서글하고 큰 눈동자였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 있는.
“아! 드디어 한국말을 하는 분이 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