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청록의 시간> 1권에서 이어집니다. 보지 않으신 분들은 1권을 읽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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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741년, 아시아 연방 제2 도시.
“이프리트 경위님, 이제 오십니까.”
폴리스 라인의 경계에 서 있던 제복을 입은 경찰은 깜짝 놀라며, 뻣뻣하게 굳은 채로 경례했다. 경례를 대충 받은 상대는 검은 롱 코트를 입고 있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귀찮다는 듯 쓰고 있던 검은 중절모를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중절모 아래로 붉은색의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있었으며,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탄탄한 몸 라인이 코트 안으로 언뜻 보였다. 그는 느릿하게 폴리스라인을 넘어서 현장 안으로 들어왔다. 소란스러운 밖과 달리, 폴리스 라인 안쪽 라인 코팅 돔은 비를 포함해 구경꾼들의 소리까지 모두 차단되었다. 비를 털어내던 그는 순경의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고든 순경…. 감식봇은 어디에 있나?”
“저 뒤쪽 골목에서 현장 자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검은 중절모의 이프리트 경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을 순경에게 비추었다. 그는 수많은 강력범죄 사건을 해결한 강력계 팀장, 이프리트 경위다. 명석한 인공두뇌로도 유명하지만, 전투용 티타늄 글로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투경찰이기도 하다. 아시아 연방 제2도시에서 그를 모르는 경찰은 없었다. 고든은 그 차가운 눈빛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곧 살짝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바뀌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현장이 저 골목 뒤면 여기까지 50미터도 넘을 텐데, 뭣 하러 여기에 라인을 쳐놓고 통제를 해? 귀찮게 ‘현장 안전 걸음’으로 저 멀리까지 걸어가야 하잖아.”
“죄… 죄송합니다, 경위님! 저희는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감식봇의 판단대로 라인 위치를 정했을 뿐입니다.”
별것 아닌 표정에도 긴장하는 순경이 귀여웠는지, 이프리트는 고든의 어깨를 툭툭 쳤다. 폴리스 라인의 경계에서 경계를 서는 순경. 그 경계는 작은 결계나 마찬가지여서, 말단 순경이 맡고는 있지만 매우 중요하고 고된 일이었다.
“긴장하지 마, 고든. 감식봇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안 그래?”
이프리트는 ‘현장 안전 걸음 모드’를 켰다. 그의 옷과 구두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나며, 비에 젖은 코트와 옷을 순식간에 말려버렸다. 그리고 구두의 앞 코에서 얇은 현장 안전 걸음용 삼발이가 나와 구두의 발끝 모서리로 서서 총총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갈 때 본래는 깨끗한 덮개를 구두에 씌우고 들어갔었지만, 5년 전 그것 때문에 중요한 증거가 뭉개져 버리는 사태로 미제 사건이 발생하자 발끝으로 걷도록 지침이 바뀐 것이었다. 드론으로 날아서 이동하는 것과 안전 걸음 중, 예산과 움직임의 미세 조정 방식 등의 이유로 고위 간부들이 내린 결정이었는데, 경찰들은 대부분 이 결정을 싫어했다. 정부가 ‘해결이 안 되는 일’에 대해 너무 민감하다는 말도 많았고,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는 게 현장용 구두의 도움을 받는다지만 경찰의 입장에서 볼썽사나웠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드론을 선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프리트는 살금살금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내가 고대 만화에 나오는 도둑 같잖아.’
그는 폴리스 라인 안쪽의 고요함을 참 좋아했다. 그가 경찰이 되어서 여러 범죄들을 접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이 풍경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동기 중에 하나였다. 대략 340년 전부터 실용화가 된 폴리스 라인 코팅 돔은, 현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거리까지 고차원 분자의 코팅 버블을 통해 바깥과 안을 차단시켜 버린다. 비와 먼지의 유입은 물론이고 공기의 흐름도 차단해 소리도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빛은 파장이 바뀌긴 하지만 코팅 돔을 뚫고 들어올 수 있다. 그 경계에 있는 노란색의 폴리스 라인은 버블로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에어락인 셈이다. 이 라인 코팅 돔은 범죄 현장을 보호하는 일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쓰였다. 산업현장의 안전, 범인 검거, 심지어 정부 고위 관료들은 캠핑할 때도 쓴다는 말이 있었다.
하늘은 코팅 돔의 경계 때문에 특유의 보랏빛을 띠었다. 라인 코팅 돔의 밀도 차이 때문에 파장이 짧아지기 때문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보랏빛 노을 느낌의 적막한 길.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고요함. 그건 그의 머리를 헤집는 수많은 사건과 범죄자의 소음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고 있었다. 잠시나마 풍경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힌 이프리트는 귀 뒤에 손을 가져다 대고 손가락을 움직여 감식봇에게 음성 통화를 걸었다.
“감식봇 TR-1749, 나 이프리트 경위다. 지금 코팅 돔 안으로 들어와 골목을 막 돌아 들어가려는 중. ID 넘버는 10423524Q. 이미 알겠지만 사건 번호 3741-102408을 맡았다. 현장 감식 조사 자료 조회에 응해주기 바란다.”
“이프리트 경위님, ID 인식되었습니다. 현장은 지금 계신 곳에서 약 12.5m 떨어져 있습니다. 현장이 어지러워 발 디딜 곳을 표시해 두었으니 표시한 곳만 밟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프리트가 골목을 돌자, 그 앞엔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몇 시간 전에는 살아있었을, 세 명의 잔해가 방사형으로 길게 흩뿌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하늘의 별을 이 악물고 바닥에 내던져 터트려 놓은 모습이었다.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 잔해에서 죽은 세 명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잔해들은 반경 9m 정도 안에 흩뿌려져 있었고, 이프리트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이쪽입니다, 경위님. 2층으로 올라오세요.”
옆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감식 본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거미 같은 4개의 다리를 가진 감식봇이 자료를 분석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경위님, 이곳은 사건과 관계없는 장소로 분석된 곳입니다. 현장 안전 걸음을 해제하셔도 됩니다.”
“읏차…. 고마워.”
이프리트는 발바닥을 밟으며, 발목을 휘휘 돌렸다.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감식봇이 있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바닥까지 내려가 있는 그 창문에선 현장이 훤히 보일 터였다. 이프리트는 그 끔찍한 현장을 위에서 바라봤다. 소형 정밀 감식봇들이 드론을 타고 바쁘게 다니며 잔해를 분석하고 있었다. 쟤네는 드론으로 이동하고 경찰은 왜 안되는 거야? 이프리트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프리트는 감식봇에게 말을 걸었다.
“TR-1749,”
“테트라라고 불러 주세요, 경위님.”
“아하하핫! 재미있는 이름이네, 테트라. 자네 다리가 4개라서 그리 지은 건가? 얼핏 테트라포드 같기도 하고.”
감식봇이 이프리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감식봇의 카메라가 퉁명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 아뇨. 테트라는 아프리카에 사는 예쁜 관상용 물고기 종류입니다.”
“아, 그래. 큽. 미안. 자네의 센스를 놀릴 생각은 없었어. 물고기는 내가 잘 몰라서.”
이프리트는 웃음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어쨌든, 테트라.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뭔가? 보통 감식봇 선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범인까지 특정하잖아? 나야 범인 잡으러 뛰어다니는 일을 주로 하는 건데.”
“경위님, 이런 흔적이 남은 사건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 난 처음 봐. 태어난 지 71년밖에 안 됐거든. 그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난 모르지.”
“저는 2874년 5월 14일 이후부터, 3741년 12월 6일인 오늘 아침까지의 데이터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은 고고학으로 분류되어 현재 사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정부의 판단에서죠. 의미 있는 전자식 정보가 많지도 않고요. 그 867년 동안의 사건이나 종교, 문화 등을 다 검색해 봐도 이런 범죄현장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 30세기 이전에는 전쟁에 쓰이던 대량의 화약이나 폭탄들도 있었잖아. 이런 폭발력이라면 그런 고대 전쟁 무기들도 생각할 수 있어.”
“경위님, 여기 이 데이터를 봐주세요.”
테트라는 창문에 AR 데이터를 비추어서 현장에 데이터가 그대로 겹쳐 보이도록 만들었다. 주 폭발처럼 보이는 곳은 세 군데. 그러나 그 지점들의 안쪽은, 폭발의 시작점으로 보이는 피해자의 몸속은 칼로 도려낸 듯 깨끗한 작은 원 모양으로 파편들이 사라져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볼 때는 잘 몰랐던 것이, 다른 지점의 파편이 튀어서 그 도려낸 듯한 원이 가려진 것이었다. 색으로 잘 구분시켜 보니 확연하게 비어 있는 원이 보였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후광을 표현한 조각같이 성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죽은 피해자 뉴먼들은 28세대의 강화 알루미늄으로 된 신체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 바디는 30세기 이전의 화약이나 폭탄 무기로는 이렇게 멀리까지 파편이 날아가도록 산산조각 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폭발 지점에서 약 23cm 크기의 도려낸 듯 비어 있는 공간이 보이시죠. 파편의 위치로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이 폭발은 그들의 몸 안에서 일어났고, 부서져 날아가는 동안 23cm 크기의 구 모양으로 공간 절단이 일어난 걸로 보입니다. 이 폭발은 내부의 핵융합 전지를 건드려 산산조각이 난 것이고, 어찌 된 일인지 산산조각 나서 날아가는 동안 폭발력보다 천천히 날아간 것 같습니다. 분석한 걸 정리해 보면, 그들의 핵융합 전지 내부에서 조그만 구 모양의 공간 단절이 일어났고, 그 단절로 인해 핵융합장치가 폭발했으며, 공간단절이 갑자기 생겼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주변 공기와 공간이 빨려 들어가 폭발의 힘이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프리트는 순간 몸을 떨었다.
“난 29세대 최신 바디이긴 하지만…. 어쩐지 무서워지는걸. 본 적 없는 무기로 뉴먼을 이렇게 간단히 파괴할 수 있다는 게. 범인과 마주치면 나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지?”
“제 계산으로는 그렇습니다.”
“공간 단절이라면…. 내가 잔여 중력파를 스캔할 수 있어. 요새 새로운 불법 무기들이 암시장에 돌고 있는데, 그 무기들은 쓰면 잔여 중력파가 공간에 남거든. 그래서 과기부에 의뢰해서 며칠 전 최신 스캐너를 내 눈에 달아놨었지. 자네나 저 소형 감식봇들이 스캔할 수 없는걸 볼 수 있을 거야. 잠깐만.”
공간 단절은 약 3년 전 만들어진 최신 기술로, 워프 이동 기술을 응용한 거였다. 워프 할 때는 공간을 접어야 하는데 그때 주변에 접히지 않은 공간과 아주 작은 단절이 일어난다. 그 공간 단절과 행성의 이동속도를 이용하면 무엇이든 자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구에서 사용은 금지되어 있고, 먼 행성들의 채굴기술로 응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고 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해서, 현재 기술로 소형무기화 하긴 힘들었고 정부에서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암시장에 불법 무기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경찰은 그 부분도 수사 중이었다. 만약 그 기술이라면 중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잔여 중력파가 남아있을 터였다.
이프리트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오른쪽 눈이 열리고 조그만 3축으로 된 십자가가 펼쳐졌다. 공간 단절에 의한 잔여 중력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다 이상한 점을 스캐너가 감지했다. 그 잘려진 듯한 원 가운데, 아주 미세하게 공간이 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0.3 나노미터 정도였다. 이프리트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테트라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경위님! 그렇게 뛰어내리시면…!”
이프리트는 현장 안전 모드로 전환해, 까치발로 정확히 잔해들 사이에 착지해서 원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공간의 휘어짐은 아주 미세했다. 0.2 나노미터, 0.1 나노미터, 0.004 나노미터.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이프리트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미안해, 테트라. 방금 공간 휘어짐이 아주 미세하게 있다가 사라져 버렸어. 공간단절 기술은 휘어짐이 남아있지 않거든. 내 생각엔 이건 분명 초소형 블랙홀이야.”
“네? 지금까지 초소형 블랙홀을 이용한 무기는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론상은 가능하지만, 기술적으로 아직 문제가 많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굉장히 비밀리에 그 위험한 물건을 만들어 놓고 있다면, 그건 사상 초유의 사태가 될 거야. 범인의 흔적은 없어?”
“이곳은 CCTV가 없는 곳이라 다른 건 확인할 수 없고, 발자국이나 흔적들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흔적을 보니, 이들은 어느 한 명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습니다. 싸움이 있었고, 그는 많이 맞았습니다. 그의 이전 행적을 추적해 보니 그는 평범한 대학교수이고, 폭력 전과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건 이후에도 숨으려 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한 것으로 나옵니다. 참고인은 될 수 있겠지만, 범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싸움을 보고 멀리서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를 도와줬을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범인일 수도 있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나 보시겠어요?”
“응, 주소와 이름은?”
“제214 빌리지 345호, ID 넘버는 00054239J, 연방 대학 고고학과 교수 케이아스입니다.”
“오케이, 수고. 그리고 테트라, 예쁜 이름이야.”
“네, 네, 감사합니다, 경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