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코리 Jun 17. 2019

당신이 여기 에이스라고?

칭찬에 춤추던 고래가 직면하는 3가지 위기

대부분의 회사라는 동물원에는 대리, 과장이라며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있다. 그런 호칭에서 한 번의 좌절도 없이 잘 올라갔던 것은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그만큼 하기 싫은 일도, 보기 싫은 동물들에게도 거침없이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주위의 동료 원숭이들을 힘들게 한 적도 분명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을 못할 정도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코리가 없으면 안 돼, 여기 에이스잖아.


동물원 경력이 늘어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잘하는 두목 원숭이들이 한두 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음의 3가지 서비스 중에 최소한 한 가지를 내게 기대했다.



01 열정 페이


고졸 출신으로 엄청난 공을 던지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끈 투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에이스라고 불렀다. 그는 투수가 취해야 하는 휴식량을 뒤로한 채, 팀이 필요할 때는 계속 등판했다. 그의 어깨는 그렇게 망가져 갔지만, 구단은 헌신한 그에게 헌신짝 같은 연봉 인상을 제안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니, 에이스 코리가 맡아줘.


에이스라는 말에 뿌듯했을까? 아니면 나중에 큰 보상을 받으리라 기대했을까? 덥석 그 일을 맡은 후 새벽에도 출근하고 자정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회사일을 했다. 아이들은 부모님과 아내에게 맡겨두고 주말에 잠깐 시간을 만들어 교외로 잠시 다녀오면 괜찮은 줄 알았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 근데 돌아보니 열정 페이더라.


퇴직한 선배와의 저녁 약속에도 어김없는 야근으로 늦은 그날, 선배는 인스타그램의 좋아요에 집착하듯 두목 원숭이를 바라보지 말라는 충고를 남겼다.

 

이 바나나 너 줄까? 아니면 네 동기 준다? 후배 준다? 괜찮아?


그러게.. 한때 그 바나나가 너무 먹고 싶었나 보다. 빨리 바나나 모아서 남들에게 앞서간다는 이야기도 듣고 좋아요도 받고 싶었나 보다. 그 사이에 어깨 부서지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 코리도 우리 K 동기구나. K도 우리 에이스야.

 

제발 에이스라는 용어 따위 쓰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칼 퇴근을 선언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조직의 동기 K와 그의 팀장을 만났다. 그 팀장은 K와 함께 야근을 해야 한다며 근처 햄버거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 에이스는 열정 페이 야근을 위해 여물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차마 꺼내지 못했다.


K야, 둘째가 세 살이던가? 한참 예쁘겠다.


02 감정 노동


후배들이 알면 부끄럽거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내용을 명령받았을 때 얼굴이 찌그러진 적이 있다.

 

코리야, 회사는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표정 관리 좀 해.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협업하는 일이 많고 집단지성 발휘를 위해 동료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의미인 줄 알았다. 사람들 간의 다름을 존중하고 시너지를 만들어 성과를 창출하는 리더십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두목 원숭이들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회사 일 외에 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본 적도 없는 아부 영화의 대사가 동물원의 유행어가 되고, 한술 더 떠서 두목의 지령을 미화해서 해석하면 더 훌륭한 직원이 되었다. 후배를 축하하는 자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몇 번을 연기할 수 있어도, 대왕 원숭이의 생일 케이크는 어김없이 제시간에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게 부럽고 억울하면 성공해.


부럽냐고? 그게 성공이라고? 미안한데.. 사실 부끄러워서 그래. 만약 그게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더 부끄러워서 그래.



03 갑질 대행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건강검진을 새벽같이 하고 이른 오전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선배가 있었다. 그는 바빠서 서둘렀다며 너희들은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그 이야기는 '나는 잠깐도 안 쉬고 일할 테니 들어가서 편안하게 쉬어'라는 소리로 들렸다.

 

저 선배가 오버하니까 점심 먹고 복귀하는 우리가 태만한 것 같잖아.


팀원들은 그를 불편해했지만, 그런 그를 두목 원숭이는 열정이 넘치고 솔선수범하는 존재로 평가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 했던가? 시간이 흘러 내 차례가 왔다.


코리야, 내가 직접 말하기는 좀 그렇잖아. 알아서 좀 챙겨줘.


후배들의 옷차림, 출퇴근 시간, 실적 압박 등 두목 원숭이가 직접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나쁜 선배가 되어갔지만 괜찮았다. 두목은 나를 열정이 넘치고 솔선수범하는 선배라며 상을 줬다.



예전에는 에이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야구선수들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들은 야수가 수비 실책을 해도 다음 상대 타자에게 어김없이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에이스를 본 적은 있지만 '다른 의미의 에이스'들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기형적인 에이스들은 열정 페이, 감정 노동, 갑질 대행을 자기 합리화를 통해 '회사를 위한 일'로 둔갑시키고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곧 회사 자체인 것처럼 행세하며 서로를 세뇌하고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에이스야. 회사만 생각하시는 분이야.


나는 이제 에이스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내게는 이미 충분히 더럽혀진 단어가 되어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