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
2차 세계 대전 말, 헝가리는 독일에 의해 점령당한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쾨베시의 아버지는 독일군에 의해 노동인력으로 끌려가게 된다. 얼마 못가, 쾨베시마저 벽돌 공장으로 동원된다. 그는 새엄마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굳은 믿음 속에서, 매일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행한다. 그러나 쾨베시마저 갑작스럽게 독일군에게 잡히며 아우슈비츠로 향하게 된다.
@ 평소 독일인들의 정확함과 예리함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쾨베시는, 역설적으로 독일인들의 정확함과 예리함에 의해 노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분간을 받으며, 수용소로 보내진다. 16살의 나이로, 수용소로 보내진 죄르지에게 이제 ‘살아남아야 할 목적’만이 남아있다.
@ 헝가리 출신의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은 작가의 자전적 작품으로서,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이 겪은 참담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겪은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종전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는, 그럼에도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 소설 안에 녹여 낸다.
@ 케르테스는 16살의 어린 아이 쾨베시의 시선으로 끔찍했던 참상들을 복원한다. 이 기억의 복원엔, 어떠한 과장도 축소도 없다. 독일의 만행에 대한 고발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저 사회적 힘과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이 처참히 무너져 가는 그 잔인한 현실을 차분히 보여줄 뿐이다. 마치 영화의 롱테이크 기법처럼, 주인공 쾨베시 기억의 관념을 통해, 처절하고 잔인했던 현실을 각색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감당할 수 없는 폭력성과 무자비성에 대한 긴 묘사 속에서, 독자들은 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폭력도 생의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쾨베시는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슴 팍에 노란 별을 붙이고 노동인력으로 투입되며, 감시 받을 운명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마치 새벽이슬처럼 한 낮이 되면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 안에, ‘살아남아야 할 운명’이 꿈틀댄다. 그리고 모진 고초를 겪어내며, 비로소 살아남는 자의 ‘운명’으로 거듭난다.
@ 작가가 말하는 ‘운명’이란, 우리가 흔히 사전적 의미로 알고 있는 운명과는 다른 것이다. 운명은 ‘어떠한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미 규정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란 없으며, 오히려 ‘生’이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운명인 것이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의 의지가,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것, 바로 자유의지가 진정한 운명인 것이다.
@ 소설 마지막, 쾨베시는 극적으로 아우슈비츠에서 귀향한다. 부푼 기대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아버지의 귀향 소식은 없으며, 새엄마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삶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떠한 영웅적 결말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으로 독자를 위로해주지 않는다. 끔찍한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아 귀향한 주인공에 대한 어떠한 예우조차 없다. 어쩌면 삶 자체가 ‘살아남아야 할 전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살다보면 쉽게 개인적 운명을 탓할 때가 있다. 우아한 삶을 살지 못해서 혹은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못해서, 우리는 쉬이 내 운명을 탓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은 없다. 정해진 것이라곤, 오직 ‘살아남아 살아갈 운명’뿐이다. 아무리 누추한 삶일 지라도, 포기 가능한 삶은 없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우아한 삶이며 아름다운 삶이다. 쾨베시는 소설 마지막 독자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앞으로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