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영혼의 정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

by 마음의 고고학

때로는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달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길목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 공허한 길목은 황량하다. 이 길목에 자리 잡은 어두운 빛은 조용히 내 존재의 공허를 깊이 메운다. 그 어두움 속에서, 내 모든 빛깔은 서서히 숨 죽어버린다. 끝없는 자기연민 속에, 서서히 몰락해간다.



“그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계획한 자살이야, 충동적으로 저지른 절망적 행위가 아니야.”



@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주인공 ‘나’의 슬픈 독백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나’는 친구 ‘베르트하이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그의 죽음을 규명하고자 과거에 대한 기억들을 추적해나간다. 28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 연주 과정을 밟고 있던 이들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강의를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한편 이 강의에서, 또 한 명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이다.



“오로지 부친에게 한방 먹일 작정으로 음악을 전공했지..”


@ 베르트하이머는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해서, 피아노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돌파구로써, 피아노를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그런 무언가가 피아노에게 있을 것이란 희망 속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가 피아노를 포기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좌절감에 의한 포기였기 때문에.



@ 배르트하이머에게 글렌 굴드와의 만남은 자기 존재의 공허감을 직시하는 계기가 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은 어쩌면 내게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지..”



베르트하이머는 천재성에 압도되어 자신의 피아노 인생에 죽음을 고한다. 그리고 그는 글렌 굴드에게 빼앗긴 삶의 의미를 채우려,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런데 정신과학마저도 베르트하이머의 공허감을 채워주지 못한다. 글렌 굴드는 이런 베르트하이머를 가리키며 ‘몰락하는 자’라 부르곤 했다. 그칠 줄 모르는 자기연민 때문에, 베르트하이머 스스로 죽음으로 퇴화해가고 있었던 탓이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베르트하이머는 결국 몰락의 길, 곧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몰락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는다. 몰락에 의해 생겨나는 불안, 우울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본래 모습을 직시하게 한다. 오히려 몰락에 의한 공포는 본래 모습으로 살라는 내 존재의 울부짖음인 것이다. 돈, 명예, 성공. 이 헛된 꿈은 나를 나로서 살게 하지 않는다. 이 꿈은 달콤하게 유혹한다. 꿈이 성취되어야만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존재는 결코 헛된 꿈과 치환될 수 없다. 그 꿈이 좌절되더라도, 어떤 공포감과 불안감이 밀려오더라도, 우리 존재는 침해될 수 없다.



@ 황량한 내 존재의 터에, 우수수 낙엽 떨어진다. 추운 겨울바람에, 앙상한 나무는 몸서리친다. 앙상한 가지로 남은 나.. 가을바람 불 때 떨어지는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내 잎새들 바라보며, 내 존재의 소멸을 느낀다. 그런데 이 낙하落下는 죽음이 아니다. 낙하는 진실을 향한 내적 투쟁이다. ‘나’인척 착각했던 허상과 헛된 꿈들이 겨울바람 몸서리에 우수수 떨어진다. 결국 남는 것은 앙상한 나. 초라한 나. 그런데 추락의 깊이가 깊을수록, 내 존재의 진정성의 깊이는 더 깊어만 간다. 이 깊이는 이제 진실이 채워야 할 자리. 이제 나는 낙하를, 앞으로 다가올 추운 겨울바람을 버티기 위한 준비로 여길 것이다. 앙상한 나무들 빼곡히 자리한 내 황량한 존재는, 이제 봄날의 따순 햇살을 기다린다. 몰락, 추락, 낙하가 죽음이 아닌, 진실과 희망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IMG_9219.jpg


이전 03화인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