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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일지 (2)

2023. 07.11부터 2023. 07. 18까지

by 양양

<2023. 07. 11>

쉽지 않은 하루다. 그래도 분명 행복했어. 더운 날씨였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귀한 바람을 맞으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내가 좋아하는 향의 향수도 샀지. 너무 알찼다. 물론 중간에 렌즈 때문에 눈 아파서 고생도 좀 하고, 밥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 종일 속도 불편하긴 했지만 분명 행복이 더 컸어.

그치만 집에 돌아가는 길은 좀 험난했다. 대체 85번 버스는 어디서 타는 거며, 200번 정류장은 왜 중지된 건지. 심지어 지하철 방향도 잘못탈 뻔해서 얼마나 뛰었는지. 그래도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어쩌지ㅠㅠ'가 아니라 이 악물고 ' 누가 이기나 해보자'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아주 조금은 강인해진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기차 잘 타고 가고 있으니 된 거 아니겠니! 어떻게든 결국엔 잘 해결될 테니 앞으로도 지레 겁먹지 말고 입술을 앙 다물자.


<2023. 07.12>

(1)

혼자 보내는 마지막 날. 오늘은 좋은 공원에 가서 피크닉도 하고 오후에는 독립영화관도 가 볼 예정이다.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유럽생활에 적응한 게 참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젠 거리 하나하나 신기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여행이 일상이 된 기분이란!


(2)

너무 행복한 피크닉. 이렇게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아름답다니. 행복 치사량 초과다. 나중에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질까. 참 감사하다. 행복은 엄청난 것보다는 이렇게 평화롭고 소소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 같아. 영원했으면 좋겠다. 영원할 수 없지만.


(3)

가고 싶었던 독립 영화관이 잠겨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 우연히 다른 독립 영화관을 발견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룸바 테라피> 라는 영화를 봐야 하지만 이렇게 동네 독립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을 해보다니. 이것만으로도 정말 설레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역시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2023. 07. 13>

(1)

말도 안 되게 빠져나간 49유로만 아니었어도 오늘 하루는 완벽했을 텐데. 새 옷과 맛있는 아이스크림. 점심과 웃긴 사진. 재밌는 영화까지. 그런데 49유로 때문에 계속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잊고 놀고 싶었는데, 내 성격에 절대 그렇게 되지 않고 마음이 복잡하다. 작은 돈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아낀 돈인데. 탓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더 속상하다. 또 온전히 내 탓이라 하기엔 조금 억울하단 말이야. 어떻게 신경 안 쓸 수가 있겠어. 정말 속상하다. 그냥 정말 속상해.


(2)

재밌게 여행하다가도 꼭 이런 날이 생긴다. 괴롭게. 모든 게 다 버겁게 느껴지는. 비단 내 소중한 49유로를 잃어버려서 그런 건 아니다. 모른 척하고 있지만 나는 꽤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원인 모를 소화불량과, 새까맣게 탄 피부... 내가 책임지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 와중에도 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진 찍힌 것들을 보면 한숨만 나오고, 외면하고만 싶어지고. 결국 이런 마음까지 다 다스려야 한다는 게 어렵다. 에휴. 빨래나 하러 가야지.


<2023. 07. 14>

(1)

지나가버린 49유로는 잊자. 물론 속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더욱 꼼꼼하지 못했던 내 책임이고 이런 이유들로 큰 즐거움을 놓치게 둘 수 없으니까. 하나씩 따져보면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은 너무 많다. 그래서 즐겁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여기에 지지 않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예민한 싫어하진 않지만,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선 때로 무던함도 필요한 법이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괜찮아." 그런 일도 있다. 그런 관계도 있다. 그런 결정도 있다.


(2)

시간이 참 빠르다. 그래서 무섭다. 내가 23살이 될 줄도 몰랐고, 벌써 여행의 절반이 되어간다는 것도. 그래서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는 것.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성실하고 알찬 하루일까? 후회가 없는 과거를 만들 수 있을까? 연기를 하지 않는 나는 무슨 원동력으로 살 수 있을까. 나는 항상 무용한 것들을 쫓는 것 같다. 순간뿐인 여행과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의 연속인 꿈. 그 안에서 나를 지키고 돌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텐데. 내가 특별하다는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할 텐데.


<2023. 07. 15>

(1)

벌써 7월의 절반이 갔다고? 정신 차리면 어느새 집에 돌아가있을 것 같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또 이렇게 나와있는지 모르겠다. 왜 항상 내가 꿈꾸는대로는 되지 않는지. 이제 인정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인생도 계속되어야 하니까. 기대하고 실망하고의 연속을 견뎌야겠지? 인생이 마음대로 안되긴 하지만, 그래서 또 예상치 못한 좋은 길로 나를 이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2)

점심 먹고- 베를린장벽- 갤러리 구경하고- 아이스크림- 약국과 마트 쇼핑. 제대로 다사다난한 하루. 덕분에 지금 내 꼴은 엉망이다. 이게 아닌데. 그래도 엄마 말처럼 아무 탈 없이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여행하다 보면 변수는 너무 많으니까.


<2023. 07. 17>


(1)

여행을 시작한 후로 집에서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한 적이 없으니 피로도가 쌓이는 듯하다. 그래도 시간이 아까우니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오늘은 폴란드 당일치기 여행 가는 날! 어떻게 하루 만에 다른 나라를 다녀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모른다. 그곳은 또 어떤 풍경일지, 어떤 문화가 있을지 기대된다.


(2)

생각보다 낯설어서 당황. 유럽에 적응했다고 너무 자만했나 보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첫인상은 참 좋다. 고즈넉하고 소소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 같다. 갑자기 또 '여행'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묘한 긴장감과 설렘! 기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아 벌써부터 아쉽다. 그래도 짧고 굵게 폴란드를 느껴봅시다.


(3)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너무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왔다. 꽁꽁 숨어있어서 못 찾았는데 간신히 찾아 들어오니 마치 비밀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다. 너무 짧아서 아쉬운 포즈난 여행. 꿈만 같은 하루였다. 맛있게 먹은 점심식사와 동화 같던 폴란드 도시의 풍경. 맛난 달달 아이스크림, 귀여운 동물들, 취향저격 카페까지.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일단 도전해 보는 게 좋다. 후회가 남지 않으니까. 경험과 성장을 주니까.


(4)

그래서 내일이면 여행의 절반이 지나가는데.. 지금 내 상태는 어떠한가. 아쉽기도 하고, 얼른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물론 내 생각대로의 '이상적인' 여행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어리숙한 나였고, 예상치 못한 문제와 장애물도 있었다. 그렇지만 돌아봤을 때 결코 여행이 별로였다 거나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인생도 그렇다. 절대 내가 꿈꾸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동안은 이런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생각대로는 아닐지라도 삶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다가 좌절하더라도 힘을 내서 다시 기대하자. 그리고 내 이상대로 현실이 굴러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자. 내 삶이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빛나는지는 후에 그 가치를 알게 되니까.


< 2023. 07. 18>

(1)

시간 진짜 빠르다. 벌써 독일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기억이라는 게 항상 선명히 존재해 주면 좋을 텐데. 몇몇 장면들 말고는 다 흐릿해져 가는 게 아쉽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래도 현재를 살고, 현재를 즐겨야지. 오늘 하루 맛있는 점심을 먹고 아름다운 베를린의 풍경을 마음껏 만끽하지!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리고 다가올 체코 프라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자.


(2)

마지막 만찬을 위해 슈바인학센을 먹으러 왔다. 슈니첼을 먹어야 하나 사실 고민이 많았는데, 그냥 먹고 싶은 걸 먹기로 했다. 마지막 날 장소 선정을 잘한 것 같다.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왔으니까! 베를린 돔과 센프레강. 한없이 멍 때리며 감상해야겠다. 사실 파리에서는 다사다난하기도 했고 복작복작한 재미가 있었는데, 베를린은 비교적 여유롭고 수월하게 머물렀던 것 같다. 베를린은 그런 재미가 있었지. 조금은 편히 머물 수 있었던 도시. 좋은 쉼터가 되어주어서 고마워. 덕분에 남은 세 나라를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을 얻었어.

*부록

(1) 가수 서동현의 짝사랑을 담은 노래 '마지막 시'의 라이브 클립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공연 도중 새 여자친구와 뽀뽀를 하는 퍼포먼스를 봤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2) 웃을 때 유독 못생겨지는 나. 어떻게 해야 할까?

1. 웃지 않고 산다.

2. 못생김을 감수하고 웃는다.

3. 장성규 님처럼 인위적인 가짜 웃음으로 연명한다.


(3)

여유, 독서, 다정과 같은 단어를 참 좋아하지만, 이런 단어들은 성공, 돈, 명예와 같은 단어들 앞에서는 유독 힘을 잃고 초라해져 버렸다. 나는 초라함을 쫓고 있나?


(4)

쌍꺼풀이 있는 사람은 무쌍이 될 수 없다. AB형의 인간은 O형이 될 수 없다. 독일인은 프랑스인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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