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7. 19부터 2023. 2023. 07. 23까지
<2023. 07. 19>
(1)
프라하로 이동하는 날. 얼마나 일이 잘 풀리려고 액땜을 하는지. 줄 이어폰도 잃어버리고, 기차역 틈에 다리가 빠지기까지 했다. 물론 다 큰 사고는 아니긴 했지만. 사실 이런 걸로 재수를 따지는 나도 웃기지. 다 아무 상관없이 나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인데. 무조건 정신을 더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다. 사소한 문제들로 오늘 하루는 망했다거나 내 인생은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는 습관은 이제 그만둘 거다. 다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이었던 거고 나는 그냥 더 씩씩하게 다음 관문들을 헤쳐나가면 되는 거다. 제발 프라하까지 잘 도착하자! 지금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2)
정신이 혼미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새벽 6시 30분에 기상해서 기차역에 9:30 도착. 약 2시간 정도 기다렸으나 기차가 무지 연착됐다. 기다림 끝에 기차를 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결국 승무원분이 좌석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못 탄다고 나를 내쫓으셨다. 그렇게.. 기차역에 남겨졌고 프라하 쪽 숙소에 연락하려고 했더니 연락이 닿지를 않았다. 또다시 2시간 넘게 기차를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탈 수 있을지 조차 미지수였다. 다리도 너무 아프지만, 그냥 어떻게라도 무사히 기차를 타길 바랄 뿐이다.
지금은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기차를 탔고, 옆 자리에 탄 한 부자를 만났다. 플로리다에서 온 max라는 친구인데 이 친구도 똑같이 11시 기차를 취소당해서 멘붕의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 물론 아직 숙소에 도착한 건 아니니 안심할 수는 없다. 여행이란 절대 쉽지 않다. 너무 많은 변수가 뒤따른다. 잠시 해이해질 뻔한 나를 다시 정신 바짝 차리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너무 겁먹지 말고 긴장하지 말자. 결국에는 다 헤쳐나갈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3)
하루가 원래 이렇게 길었던가. 숙소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너무 가고 싶다. 여긴 헤어드라이기도 없고 온수도 안 나오고, 세면대도 없고 물도 안 잠기고 불도 안 꺼지고....... 어쩜 좋냐
우리 집이 너무 그립다. 베를린을 떠나니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 외딴곳에서 어떻게 혼자 버티지 또? 아직도 집에 가려면 한 달이나 남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몸도 성한 곳이 없다. 오늘은 정말 다사다난하고 지치는 날이네. 하루 종일 긴장하고 불안해하느라 수고 많았어. 난 언제나 널 믿어.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야.
<2023. 07. 20>
(1)
프라하 첫날! 아직 체코에 대한 감이 좀 안 오긴 한다. 그냥 계획 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동화 같은 돌길과 골목골목 귀여운 건물들은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든다. 프라하의 빈티지샵은 그리 트렌디해 보이지는 않았다. 쇼핑할 맛은 없겠다. 그래도 혼자서 자유를 누리며 돌아다니니 기분 좋기는 하다. 어제 이후로 조금 지쳐서 집에 가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도 가득하지만... 내가 가장 오고 싶었던 도시니까. 여기저기 빨리 다 가봐야 하는 마음보다는 천천히 둘러보고 좋은 곳들은 두 번, 세 번씩 가고. 그렇게 프라하를 깊게 느끼고 가고 싶다. 마음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2)
그리고 내일은 친구가 된 맥스와 만나서 놀기로 했다. 여행 오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사건이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와 놀게 되다니. 이런 일이 진짜 있구나. 완전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파리에서도 그렇고, 프라하에서도 그렇게 인연이 생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공부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내일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다른 나라 친구랑 놀아보는 건 처음이라ㅠㅠ. 그래도 혹시 모르지 엄청 잘 맞고 재밌을지!
(3)
다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나에게는 왜 유독 그게 더 어려운 걸까. 남들은 잘만하던데. 언제까지 이 끔찍한 외로움과 싸우게 될까? 그렇다고 연애를 무지하게 하고 싶은 건 또 아니다. 그냥 다들 하는데 나만 못해서 이게 내 결함처럼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으니까. 확실한 건 난 그럴 팔자가 아니라는 거다. 내가 정말 외모가 별로라서, 혹은 매력이 없어서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이유로 날 미워해선 안된다. 나라도 나를 사랑해야 하잖아? 언젠가 먼 미래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겠지. 나를 알아봐 줄 사람. 나를 채워줄 사람.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난 나중에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배우가 되려나 봐. 그때 모든 걸 다 돌려받으려나 봐.
<2023. 07. 21>
(1)
길었던 하루. 뭐부터 써야 할지. 맥스와 만나서 아침 먹은 거? 아니지. 벌금으로 1000 코루나 내고, 억울하게 사기당해서 3000 코루나나 잃은 거? 아니지. 어제로 돌아가야 한다. 밤새 물이 나오지 않아 끙끙대고, 호스트는 계속 의미 없는 답만 내놓고. 어쩌다 물 트는 데 성공했더니 40분 넘게 물 꺼지지 않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그 새벽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서러움이 폭발해 버렸다. 너무 힘들고 집에 가고 싶었다. 결국 숙소에서는 뜨거운 물밖에 안 나온다. 지금도 그냥 기안 84처럼 사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거의 15만 원이나 날리다니. 말이 되나? 내가 미쳤나 혹시? 아니면 세상이 나를 속이는 중인가? 참 별 일을 다 겪는다. 아까 오후에는 당장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가 있어서 버텼다. 진심으로. 그냥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세상이 어떤 시련과 어이없는 일을 내게 던져도 나는 결코 행복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만 잊자. 내 잘못도 있고, 언제나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 조금씩 더 아껴가면서 알뜰히 버텨보자. 넌 할 수 있어. 나는 절대 약한 사람이 아니야.
(2)
그리고 맥스! 내 친구. 기차에서 만난 친구와 이렇게 만나서 놀고 가까워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하루 종일 걷고 돌아다니고 맛있는 걸 먹고. 신기한 것들을 보고.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 탓에 답답했지만 그래도 우정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맥스가 나에게 해준 여러 말들이 큰 위로가 되었다.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바라봐주는 친구 같다. 동시에 나도 맥스의 친화력과 친절함을 배워야겠다. 그리고 열려있는 마인드도!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2023. 07. 22>
(1)
자리를 되찾읍시다. 그리고 여유를 가집시다. 나의 패턴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천천히 음악을 들으며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한 끼를 먹고! 요 며칠 너무 다사다난해서 정신도 없고 많이 휩쓸렸지만 앞으로 한 달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여행을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후회하지 않게 많이 보고, 쉬고 즐기자!
(2)
정말 프라하는 애증의 도시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웠는데 오늘 간 비셰흐라드에서 본 풍경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강가와 귀여운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동시에 또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엄마 아빠랑 같이 봤으면 어땠을까? 내가 혼자라는 걸 또 실감했다. 그래도 슬프진 않았다. 행복해서 울컥한 거다. 남은 여정에, 놓인 날들에 미리 걱정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하루와 순간을 그대로 누리자. 그러다 보면 시간은 흘러갈 거고 곧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있을 거야. 아주 성장한 채로.
<2023. 07. 23>
(1)
어젯밤은 정말 최악이었다. 왠지는 몰라도 배탈이 나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계속 화장실에 가고, 몸은 으슬거리고 속은 메슥거리고.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깊이 잠들지 못했다.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머리에서 울리는 것만 같아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 새벽에 계속 엄마한테 징징거리기나 하고. 그렇지만 너무 괴로운 걸 어떡해.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결국 아침은 오고.
다행히 아침에 성당 미사를 볼 수 있었다. 비싸고 맛난 꼴레뇨 먹기 버킷리스트도 달성하고. 그리고 오늘은 맥스가 떠나는 날이다. 내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이 많이 들 줄 몰랐다. 맥스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 역시 그런 면을 많이 배웠다. 밴쿠버에서 혹은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 그나저나 앞머리 잘라야 하는데.
(2)
갑자기 우연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오게 되었다. 한 성당에서 하는 공연인 듯하다. 사실 좀 비싼 가격이었지만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뭐든 하는 게 낫다. 당장 눈앞에 놓인 돈 문제나 작은 것들에 연연하다가는 멀리 볼 수 없고, 큰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돈 아까워 말고 즐기자. 언제 또 성당에서의 클래식 공연을 들을 수 있겠어! 기대기대. 끝나고 나가서 야경도 봐야지.
*부록
To Max
맥스. 너의 메시지에 저말 감동받았어. 너는 내 첫 외국인 친구야. 네가 가지고 있는 친절함과 친화력은 정말 귀하다고 생각해. 우리는 기차 안에서 굉장히 적은 확률로 만난 귀한 인연이니, 쉽게 끊어지지 않을 거야. 적은 확률을 뚫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해. 내 영어가 서툴러서 미안해. 다시 널 만날 때까지 많이 공부하고 연습할게. 너에게 항상 행복한 일만 생겼으면 좋겠어. 건강해.
ps. 너희 아버지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