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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일지 (2)

2023. 07. 24부터 2023. 07. 28까지

by 양양

<2023. 07. 24>


(1)

잠을 푹 자는 날이 없구나. 어제도 심한 잡꿈을 꿨다. 내 귀가 잘리는 꿈이었다. 게다가 새벽에 벌레를 잡느라 한 번 깬 이후로 잠이 달아나서 거의 설쳤다.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난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 인간이 분명하다. 관광 명소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 왔는데 흥이 안 난다. 프라하 성, 황금 소로 성당 등등 티켓을 돈 주고 끊어야 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치이기 일쑤다. 게다가 난 혼자이니 쪽수에서도 밀린다. 기가 쪽 빨린 채로 스타벅스에 갔는데 이게 웬 걸. 스타벅스도 바글바글거린다. 심지어 한국인이 대다수다. ㅋㅋ. 덕분에 체코 프라하가 대한민국 강릉이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절대 함께 하하 호호 웃는 그들이 부러워서 이런 삐딱한 표현을 쓰는 건 아니다.

(2)

나는 결과 중시자형 인간이다. 유럽 여행이 끝난 뒤 반드시 어떤 결과가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 초반인 런던, 파리에서는 그게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 시점에는 내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 여행으로 내 인생이 바뀌기를 기대한 건가? 그럴 수가 없잖아. 어렸을 때부터 항상 뭔가를 100% 즐기지 못했다. 좋은 결과를 받아야만 과정도 의미 있어졌고 늘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보다. 이토록 강박적이고 예민하고 꼬여있는 나를 어째야 하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겠고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할지가 문제다.

나는 걸음이 느린 사람. 천천히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벌써 나를 지나쳐가고 시간은 내 걸음에 맞춰주지 않더라. 난 언제쯤 쫓기지 않게 될까? 언제쯤 내 속도대로 가도 즐거울 수 있을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뭐지?

-진심으로 바라는 게 뭐지?

-어떤 내가 되기를 바라나?

-연기를 하지 않는 나도 괜찮을 수 있을까?



(3)

남들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지 말 것. 남들이 모두 맛집으로 평가하는 밥집이 나는 별로일 수 있고, 맛집 옆 휑한 동네식당이 내 입맛에는 제격일 수 있다. 23살이라고 무조건 연애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프라하성보다 비셰흐라드가 더 마음에 들 수 있다.


(4)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내일 발을 헛디뎌서 죽을 수도 있지. (너무 극단적 표현인가?) 그래도 우주는 존재할 거고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니 지나친 자의식은 금물이다. 무언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우주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우주보다 커질 수 없다. 원래 누굴 좋아할 때도 지나치게 의식하고 기대하고 긴장하다 보면 더 안 풀리기 마련이잖아. 내 꿈도 인생도 그럴 거다. 힘 빼고 삽시다!


<2023. 07. 25>


(1)

프라하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했는데 어찌저찌 잘 지내기는 하는구나. 오늘은 코젤로브나에 가서 비프 타르타르와 흑맥주를 먹었다. 흑맥주... 정말 맛있었다. 후식으로는 달달하고 맛난 굴뚝빵도 먹었다. 악마의 칼로리를 가진 맛이긴 했지만 맛집 인정! 그리고 정처 없이 걸었다. 가려고 했던 곳들이 거의 돈을 내고 티켓을 사야 하거나 막상 가보니 별 게 없어서 좀 허탈하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곳들도 많았으니까.

걷다 보니 뜬금없이 비가 왔다. 그것도 완전 폭우. 어제처럼 좀 내리다 말겠거니 했는데 우산이 뒤집어질 정도였다. 우산도 없던 나는 결국 스타벅스로 향했다. 스타벅스 안에는 이미 비를 피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역시 여행을 하면 별 일이 다 있다. 그렇지? 그렇게 비가 그치고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첫날부터 찜해두었던 동네 카페에 왔다.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았어. 내 취향에 딱 맞는 카페다. 지하에 따뜻한 조명이 있고 커피에는 산미가 있다. 아늑한 아지트 같다. 이 동네 사람들도 많이 오나 보다. 우리 집 옆에도 이런 곳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앞으로 프라하에서 보낼 날도 3일밖에 남지 않았네. 더 오래 머물고 천천히 걷고 눈과 귀로 담자.

(2)

앞으로 큰 이벤트는 대략 2~3개가 남았다.

프라하에서 밀라노로 넘어가기. 밀라노에서 바르셀로나로 넘어가기. 모두 버스를 타고 밤새 가야 하는 여정이라 걱정이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나머지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물론 힘들겠지. 불안하고 무섭겠지만 이제 정말 조금만 더 해내면 된다. 제발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사고 없이 엄마아빠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해주세요..!

* 11시에 체크아웃

*프라하 중앙역에 짐 맡기기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던 곳들 가보기

*다시 짐 빼서 버스터미널로

07:20 pm-09:10am

*milan 버스터미널- 지하철 타고 숙소 찾아가기- 짐 미리 맡기기

*밀라노 둘러보다가 오후 7시에 숙소 체크인


(3)

인생은 용기냄의 연속. 걱정되는 일 투성이. 나를 상처 주고 떠나는 사람들의 환승역. 이걸 이겨낼 만큼 자랐음을 실감한다. 나를 나사처럼 조였다가 풀어주었다가. 사고 치고 수습하고, 상처 주고 용서받고. 용기내고 좌절하는!


(4)

10년 뒤의 내가 너무 궁금하다. 33살의 나는 어떨까? 여전할까? 설마 그럴지도 몰라.


<2023. 07. 26>

체스키룸루프 당일치기 여행

(1)

어제 또 또 잠을 못 잔 터라 준비하다가 거울을 보니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더라. 버스 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터미널을 못 찾아서 1분 전에 간신히 탑승. 타자마자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반팔 입고 나왔는데 날은 또 얼마나 추운지. 역시 여행은 변수의 연속이다. 대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서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어제 잠을 못 잔 이유도 앞으로 남은 밀라노와 바르셀로나 여정이 걱정되어서다. 그냥, 1분 전에 버스에 탄 오늘처럼 그때가 닥치면 내 생존본능이 깨어나 주기를 바랄 뿐이다. 미래의 나를 믿어줘야지.

오늘 감기만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비 오는 날의 체스키롬로프! 오히려 낭만적이고 좋을 지도 몰라. 쌀국수 먹으러 왔는데 엄청 기대된다. 이게 얼마 만의 국물이냐! 너무 많이 시켰나 싶지만.. 지금 당장 힘들고 배고프니까 그냥 먹자. 먹어야 버틴다.


(2)

신기하게도 쌀국수를 다 먹자마자 비가 뚝 그쳤다. 체스키룸루프성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진에 절대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전체적으로 작고 아기자기한 동화마을 같아서 참 마음에 든다. 나를 재촉하지 않는 느낌. 천천히 구경하고, 느리게 걷고 오래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3)

왜 이 시간만 되면 힘든 마음이 몰려올까? 아마 친구들도, 부모님도 다 잠이 들고 정말 나 혼자 남은 느낌이라 그런가 보다. 견디기가 힘들다. 매일 마주하는 변수를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일과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버텨내야 하는 것. 앞으로 남은 여정들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유독 지치는 밤이다.


<2023. 07. 27>

프라하 여정 언제 끝나나 했는데 벌써 내일이면 떠나는 날. 그야말로 정말 다사다난했지. 오는 과정도 험난했고, 숙소 이슈에, 벌금도 냈고,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진 날도 있었다. 그래도 미운 정이 많이 든 건 확실하다. 내 나름대로 최애 장소들도 꽤 생겼으니. 원래 지나고 나면 다 미화되는 법 아니겠니.

오늘은 12시 맞춰서 근위병 교대식도 보고 pork's라는 식당에서 꼴레뇨를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근처 정원에 갔다. 그런데ㅠㅠ 엄청 큰 공작새가 그냥 막 돌아다녀서 도망치기 바빴다. 유럽은 새들의 천국이다

그러다 얼마 전 맛봤던 굴뚝빵이 또 먹고 싶어 져서 굴뚝빵을 사들고 프라하 다리 위에서 강가뷰를 즐겼다. 못 산 기념품도 더 사고.. 엄마 화장품이랑 귀여운 캐릭터 마그넷! 마음에 들었던 카페를 한 번 더 가보기도 했다. 비도 피할 겸. 내일이면 떠나는 날. 정신 바짝 차리자!

<2023. 07. 28>

(1)

오늘도 아마 여행일지에 쓸 말이 많을 것 같다. 사건사고도 많을 테고, 밤새 버스 타고 달리면서 많이 힘들 테니까. 그래도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껏 그랬듯 한 단계 한 단계씩 해 나가면 되는 거다.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언젠가는 밀라노에 도착해 있을 거고 마음은 편해질 거야. 그저 지금 당장의 순간들을 즐기고 맞이하면 돼.


(2)

불쌍한 여행객처럼 양 옆으로 짐을 한 바구니 들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맛난 파스타를 먹고, 굴뚝빵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먹었다. 프라하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기차(?)도 탔고 까를교도 한 번 더 건넜다. 셰익스피어 서점에 가서 만화책도 봤다. 10일 만에 프라하를 완벽 정복한 기분. 이제 구글맵 없이도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꼭 다 적응할 때쯤 떠나게 된다. 이제 또 이탈리아의 낯선 환경과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야겠지? 가보자!



*부록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유서 쓰기>

아쉬움이 많이 남네. 항상 미래 언젠가에는 내가 온전히 완성될 거라고 믿고 살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후회할 일들은 더욱 만들지 말 걸. 뭐든지 시도해 보고 많이 먹고 표현할걸. 먼저 엄마 아빠에게 미안해. 분명 내가 없으면 살 수 없을 텐데. 많이 힘들겠지만, 나는 정말 괜찮으니 엄마 아빠의 즐거움을 찾고 인생을 살아나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비록 23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꽤 다사다난했어. 언제나 열심히,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란 걸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내 인생을 한탄하거나 눈물지으며 끝내고 싶진 않아. 억울해하고 싶지도 않아. 결국 내가 죽는 것 역시도 모두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 일어났다고 믿으니까. 살아내느라 고생했다! 이제 비로소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쉬러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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