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정작 내가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1. 옷을 어디서 사세요? 온라인 쇼핑을 더 좋아해요?
2. 집에 가면 뭘 먹고, 뭘 보다가 몇 시에 잠에 드나요?
3. 무엇이 당신을 긍정적이고 명료한 사람으로 만들었나요? 늘 그런 면만 있는 건 아니죠?
4. 요즘 고민이 있나요?
5. 왜 고집스럽게도 나에게 말을 놓지 않나요?
9.
그에게 나는 아무리 애써도 고작 25살에 불과한 걸까?
내가 어떤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당장이라도 6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그간의 삶을 따라잡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
10.
어느 날, 그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했을 때.
자신의 부모와 학교생활과 가장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말했을 때.나는 그간의 마음이 여지없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인간에 대한 호기심이나 새로운 사람에대한 흥미 그딴 게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나’를 보여준다는 건,
이제부터 내 세계로 초대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초대받은 나는 그 앞을 서성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화의 끝은 “고생 많으셨어요”였다.
그놈의 “고생 많으셨어요…”
11.
오랫동안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새롭게 알게 된 남자들은 모두 자의식 과잉이거나 시시했고, 다음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뭐, 그들에게도 내가 그랬겠지.
외로웠지만 그깟 외로움에는 중독될 대로 중독된 상태였고, 늘 눈앞의 현실이 급급했다. 그렇게 앞으로는 사랑에 대해 어떤 용기도 내지 않으리라, 나를 내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또다시 사랑을 느끼는 내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12-1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나는 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 척을 했다.
괜찮은 척, 결핍 없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하지만 사실은 매 순간 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찌질한지, 관계에는 얼마나 서툰지, 볼품없는 인간인지…
너무나도 소리치고 싶었다.
비록 그가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는대도 말이다.
12-2
나는 사람들과 적당히 관계 맺는 법을 몰랐다.
너무 많은 애정을 쏟아붓거나,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미련 없이 다신 보지 않거나. 꼭 둘 중 하나를 택했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들뜬 마음과 살가운 얼굴로 그를 대했고 어떤 날에는 괜한 심통과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비록 그가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대도 말이다.
13.
그간의 경험 덕분에 내 자존심은 이미 색이 바랬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빛과 말투가 어떤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일방향적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없다.
그저, 우리 사이에 노트북을 두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아쉽게 대화를 끊어야 하는 일 없이 맛있게 밥 한 끼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14.
참 이상하다.
양방향적 사랑은 애초에 시작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유독 공허한 기분을 느꼈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늘 그랬듯 여전히 혼자 내 삶을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게 너무나도 벅차고 짜증이 났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모두 그 자리 그대 론데.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15.
그는 운 총량의 법칙을 믿는다고 했다.
그동안 힘들었으니, 앞으로는 잘 풀릴 일만 있고 싶다고.
나는 그가 운총량 법칙이 파괴될 정도로
감당 못 할 운을 누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나 그 모습 다웠으면 좋겠다.
내가 처음 봤던 그 발랄함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운 총량의 법칙이 파괴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