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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ntress Dec 08. 2020

숲속에서 음, 음, 음

매일 매일 습관처럼 누르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건강’이라는 이름 때문에 꼭 효도를 받아 마땅한 노인이 된 기분이 드는 앱이다. 하트 모양의 섬네일을 누르면 오늘 하루 걸었던 양을 거리와 걸음 수, 층계로 치환해서 알려준다. 베를린에 오고 나서 이 앱으로 매일 걷는 양을 체크하는데 평일에는 기본이 대략 15000보, 주말에는 20000보가 훌쩍 넘게 걷는다. 갤러리나 숍 하나를 정하고 둘러보고서 조금 걷다가 보이는 것들을 따르다 보면 그로부터 끝없이 걷게 된다.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서울에서처럼 꼬박 꼬박 대중교통을 타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원래 한 번 들러봐야지하고 구글 맵스에 저장해두었던 곳을 발견하거나 뜻밖의 장소를 찾아내서 역시나 또 걷게 된다. 

 그냥 걷는 것 이상의 의미도 느낀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을 제한다면 모든 건 나무 때문이다. 너무 많아서 인식하는 것이 무뎌질 정도로 베를린에는 나무가 많다. 도시에 나무가 많다기보다 나무에 도시가 둘러싸인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걸어 다닐 때는 숲속에 있는 기분이 종종 드는데 조금 이상하게 들릴진 몰라도 이 나무들은 같은 하루라도 보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해가 쨍쨍할 때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것 같은데 해 질 무렵이 되면 몸을 릴렉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가 수업에서 힘든 동작이 모두 끝나고 명상 시간을 갖는 것 같다고 할까. 저녁에 보는 나무는 이파리들을 길게 몸을 축 늘어뜨리고 쉬는 느낌이 든다.       

 한 5년 전쯤, 유화로 나뭇잎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인터뷰했다. 왜 나뭇잎을 그리느냐고 묻자 그녀가 해준 대답이다. “제가 시골 출신이에요. 몰랐는데, 서울로 대학을 다니면서 보니까 나뭇잎들이 죄다 정리가 되어있는 거예요. 전 그게 뭔가 낯설더라고요. 꼭 해야 하나 싶고요.”

 당시에는 그녀의 대답이 신선하게 들렸지만 그렇다고 그 이후로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나무를 유심히 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베를린에 와서 보니 어쩌면 이게 그 기분일까 싶었다. 가지치기하지 않아 길게 내려온 나뭇가지 때문에 건너편에 있는 상점의 간판이나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이 가려지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그대로 운치가 있다. 한 번은 정류장을 앞에 둔 서점 앞으로 구부정하게 내려온 나무가 꼭 그 서점의 그늘 같기도 하고 자연적인 간판 같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트램을 두 번이나 놓치고 의자에 앉아서 한없이 나무만 바라본 적도 있다. 

 이렇게 나무가 많은 건,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면야 나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베어버리지만, 베를린 사람들에게 나무가 주는 의미는 굉장하다. 독일에서 가장 녹지 비율이 높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인 티어가르텐에만 가봐도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웅장한 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이 공원을 걷다 보면 결코 이곳이 단기간에 일궈낸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량도 부족했던 베를린은 티어가르텐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과거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십시일반 금을 모았던 시절이 있던 것처럼, 이들에겐 나무를 모았던 시절이 있다. 황량한 전후의 최후만큼이나 앙상해진 공원을 재건하기 위해 이들은 전국에서 묘목을 모았다. 이런 것들이 국민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 생각에는 템펠호프 공항의 산책로를 지켜낸 일화에도 기운이 실린다. 쇠네펠트나 테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넓이의 템펠 호프 공항은 2008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공항은 지역 주민의 소음 피해 때문에 폐쇄했는데 사실 면적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경제적인 가치가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대단한 활용도의 공간을 여전히 남겨 둔 채, 산책로로 활용하고 있다. 재건축에 관한 여부를 시민 투표로 결정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에는 힘이 실린다.


 와중에 제주도가 왕복 4차선 도로 때문에 비자림의 나무 3000그루를 베어 버렸다. 이 사건을 보건대 한국에서 본래 그대로의 나무를 보게 되는 것은 더 어려울 거라 직감한다. 삼나무는 자연림이 아니라 베어도 큰 지장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도민 투표는 우리와 극도로 먼 이야기겠지만. 음, 음, 음・・・.



 단시간에 녹지가 형성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이렇게 하루가 멀다고 나무를 베고 있으니 내년엔, 내후년엔 얼마나 더 폭염에 시달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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