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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ntress Dec 22. 2020

도시의 조건은

자라면서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다. 아빠의 회사 발령 때문에 다 같이 대구에 내려간 적이 있지만, 워낙 어릴 때라 뚝뚝 끊긴 장면 몇 개를 빼놓고는 별 기억이 없다. 그리고 이사를 몇 번 했는데 모두 서울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못해도 30년을 서울에서만 살았던 건데 경력이 무색하게도 서울을 소개하라고 하면 무얼 해야할지 난감하다. 

 해외에 나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어렵지 않게 자주 꺼내는 이야기의 소재가 출신 국가나 도시다. 물론, 이런저런 한계로 깊은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어느 정도 서로가 꺼내는 보편적인 정도가 있다. 어학원 수업에서 하는 ‘서울 소개’, ‘한국의 음식’ 같은 주제로 문장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범위에 속한다. 그런데 정말로 책임감을 다해 추천해야 할 때는 좀 난감하다. 크리스티앙과 일라자에게 베를린의 레스토랑이나 갤러리를 추천받을 때마다 ‘서울에서 가볼 만 한 장소는 뭐가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것이 떠오르질 않았다. 

 장소가 막연하니 우선 서울의 장점에 대해 떠올려 보기로 했다. 음, 배달. 그렇다면 한강이다. 한강의 어디에 있어도 우리는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튜브스터에 앉아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배달되지 않는 음식조차도 대행업체를 이용하면 되니까 아주 수월한 일이다. 그런데 편리하긴 하지만 배달이 그렇게 중요한가? 안 그래도 한강에서 남긴 배달 음식을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쥐가 들끓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원스톱 서비스. 우리는 웬만하면 한 동네에서 뭐든 할 수 있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서점에도 가고 심지어 이 모든 걸 한 건물에서 하는 것이 가능한 상황. 그런데 또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이동의 수고로움을 언제나 비싸게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무한 반찬 서비스나 무료 식수 제공. 아, 물론 좋긴 하지만 이런 걸 앞장서서 들이밀기에는 약한데・・・. 서비스 말고, 음식 말고 우리의 문화가 뭘까. 변화가 빠르고 좋은 기술을 가장 먼저 누리는 것을 생각하고 나니 뒤이어 별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베를린에 와서 보니, 이 도시가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 남다르다는 것을 여러 번 실감한다. 갤러리나 뮤지엄이 지역마다 줄지어 서 있는데, 그 비율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어렵지 않게 성당을 마주치는 것 이상이라고 느낀다. 그 중, 역사의 일부를 담은 뮤지엄도 상당수다. 각각의 뮤지엄은 잘 보관해온 방대한 시간의 흔적을 무거운 역사적 사명감이 아니라 색다른 관점의 큐레이팅으로 능숙하게 보여준다.

 공원 또한 베를린의 곳곳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시설 중 하나인데 여느 서구권 국가가 가진 공원에 대한 인식 이상이라고 느껴진다. 흔히들 자연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도시의 전력 소비, 환경 오염, 일자리 부족에 대해 우리가 대항하려면 자연으로의 회귀는 필수가 될 것이라고. 그런데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편리함도 이유가 되지만 도시에 가족과 일자리, 삶의 많은 요건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이 절대적인 답이 될 수는 없다.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살 수 있도록 방안을 함께 모색한다.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언제든 휴식할 수 있는 장소를 최대한 많이 만들고 지켜내는 노력도 이에 속한다. 무엇보다 뭔가를 새롭게 만들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에서 생각을 더하는 것이 먼저가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생각들은 ‘베를린다운’, 베를린 스타일의’라는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다.


 여행 막바지, 일라자의 추천으로 템펠 호프 공항 근처에 있는 플로팅 유니버시티에 갔다. 말 그대로 물에 떠 있는 대학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과는 관념이 조금 다르다. 빗물 처리장을 개조한 곳으로, 나무나 파이프, 버려진 플라스틱을 활용해서 투박한 오두막 같은 것을 만들어두었다. 이곳에는 20개 대학 소속의 디자이너, 건축가, 과학자들이 분야별 워크숍을 열고 이에 흥미를 느끼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학생들은 방학을 활용해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일을 한다. 지역 주민들이 간단한 여름 휴일을 보내거나 작물을 기르고 방해 없이 책을 읽다 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자연이 좋은 해답인 것은 알지만 모두에게 최선이 아님에, 도시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존중이 여기엔 있다.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타국인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된다. 도시의 조건이 이런 관점에서 명확하다면 우리도 추천할 만한 장소가 조금 선명해지지는 않을까.



다들 외국인 친구들이 서울에 오면 어디로 안내하시나요. 경복궁이나 남산 타워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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